안전보건 선진국으로 가는 길
안전의 좌표, 사고조사 보고서 공개
고용노동부가 올 하반기부터 사고조사 보고서를 전면 공개하기로 한 것은 대한민국 산업안전 역사에 한획이 될 전향적 결정이다. 그동안 사고의 실체는 기업의 정보 보안과 관료 행정의 폐쇄적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사고 데이터는 특정 집단의 소유물이 아닌 우리 사회가 학습해야 할 ‘공적 자산’다.
이번 결정은 단순히 행정 정보의 투명성을 높이는 차원을 넘어 사고 과정과 배경을 드러냄으로써 우리 사회의 ‘안전지능’(Safety Intelligence)을 격상시키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구태의연한 우리 산업안전을 ‘사회적 학습’을 통한 패러다임 전환점이 될 정부의 결정에 큰 박수와 지지를 보낸다.
조지프 존 톰슨(J.J. Thomson)이 음극선 실험을 통해 ‘전자’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렸을 때 자신의 발견이 인류 문명을 어떻게 바꿀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사고 보고서도 그렇다. 한장 한장이 산업현장 시스템의 숨겨진 결함(Latent Failure)을 찾아낼 ‘데이터 입자’다.
정부는 이번 ‘정보 공개’가 향후 대한민국 산업 안전 패러다임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혁신할지 그 거대한 잠재력을 예상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데이터는 분명 우리 산업계의 ‘전자’가 돼 안전의 새 장을 펼칠 것이다.
안전의 발전, 사고에 관한 이해의 변화에서
하인리히의 도미노 사고 모델은 다양한 업종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의 보상통계를 기반으로 사고의 인과관계를 2차원의 선형적 도미노 과정으로 설명한다. 사고 후에서야 보이는 도미노(직접원인) 제거를 사고예방법으로 제안했다. 인지공학 조직 기술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던 당시로는 뛰어난 통찰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요소가 밀접하게 동적 상호작용하는 카오스 상태에서 발생하는 낮은 확률의 대형 현장 사고는 이미 그 효용한계 밖의 문제가 됐다.
이후 사고 과정을 입체적 관점으로 보는 사고 모델들이 제안됐고 그 중 잘 알려진 스위스 치즈 모델은 사고를 겹겹의 여러 사고 방어벽(Layer)에 형성된 결함을 모두 통과한 위험의 결과로 보고 방어벽의 결함을 찾아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
이 방법들은 사고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기는 했으나 정적인 상태의 결함 분석에 머문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안전분야 학자들은 시스템의 작동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고를 규칙 위반 같은 일탈의 결과가 아니라 시스템의 작은 결함들의 동적 조합으로 이해하고 시스템에서 문제를 찾아 해법들을 제안하고 있다.
그중 하나인 FRAM(기능 공명 분석법, Functional Resonance Analysis Method. 에릭 홀나겔)은 사고를 작동되는 시스템 내의 정상적인 변동(Variability)들이 특정 시간, 위치에서의 ‘공명’(Resonance)으로 보고 시스템 내 기능들의 입체적 동적 상호작용에서 공명(사고)될 변동들을 추적한다.
사고 데이터로 국가의 안전지능을 높여야
안전 선진국들은 이미 사고조사 데이터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핵심 자산으로 활용한다. 영국 안전보건청(HSE)는 약 50년간 축적된 사고 및 질병 데이터를 인공지능(AI)로 분석해 사고의 전조 증상이나 패턴을 찾아 해당 기업에 경고하고 행정력을 집중해 규제 효율성을 높인다. 또 조사 결과에서 도출된 예방 대책이 실제 정책에 반영됐는지를 지표로 관리한다.
독일은 산재보험조합(DGUV)과 업종별 협회(BGs)가 중심적으로 데이터를 활용한다. 2011년부터 운영된 위험관측소(Risk Observatory)는 기술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고 유형을 실시간으로 추적·분석해 사고조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업종별 맞춤형 예방 솔루션을 제공한다. 행정기관은 감독이 아닌 안전 컨설턴트로서 기업의 시스템 구축을 돕는다.
선진국들은 수사와 별개로 사고의 기술적·조직적 원인을 정리한 보고서를 산업계에 배포하고 기업들은 나름의 분석을 통해 자기 사업장의 시스템을 보완에 활용한다. 이런 행보가 산업계의 안전지능을 높이는 사고 데이터 공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사고 이해와 예방법의 발전 과정을 돌아보면 소설 플랫랜드의 주인공인 ‘정사각형’이 떠오른다. ‘구’가 평면을 통과할 때 그저 크기가 변하는 ‘원’으로 밖에 볼 수 없었던 2차원 세상의 ‘정사각형’은 ‘구’가 이끈 3차원 세상에서 평면을 내려다보고 서야 비로서 ‘구’를 알게 된다. 공개 만으로도 큰 자원이 될 사고조사가 이번 공개를 계기로 시스템적인 분석으로 도약해 후견 편향과 평면에 갇힌 산업안전계 안전지능의 차원을 바꾸는 ‘구’가 되길 기대한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