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조 ‘중동전쟁 대응 추경’…고물가·고환율에 문제 없을까
정부 “수요 보전형이라 물가 자극 제한적” 낙관적 관측
전문가 “고시대 유동성 공급 우려… 집행 정밀도가 관건”
정부가 중동전쟁 위기 극복을 위해 26조2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확정, 시장의 시선은 ‘물가’로 쏠리고 있다. 이미 소비자물가가 불안한 흐름을 보이는 상황에서 막대한 재정이 풀릴 경우, 가까스로 잡아가던 인플레이션의 고삐가 다시 풀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추경이 경기 부양보다는 ‘비용 보전’에 방점이 찍혀 있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의 진단은 엇갈린다.
◆정부의 논리 “비용보전 추경” = 기획예산처의 논리는 명확하다. 현재 한국 경제가 공급 능력에 비해 수요가 낮은 ‘마이너스 GDP 갭’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조용범 기획예산처 예산실장은 “수요가 넘쳐서 물가가 오르는 상황이 아니라, 대외 충격으로 민생의 구매력이 떨어진 것이 문제”라며 “추경을 통해 부족한 수요를 보충하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수요 견인형’ 압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추경 사업의 구성을 보면 물가 자극 우려를 낮추려는 고민도 엿보인다. 26조2000억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0조1000억원이 ‘고유가 부담 완화’에 배정됐다. 석유 최고가격제 운영 지원과 유가연동보조금은 오히려 서민들이 체감하는 에너지 가격을 직접적으로 낮추는 ‘물가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다. 즉 시중에 돈을 풀어 소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치솟은 비용을 국가가 대신 부담해 전체 물가인상을 억제하는 ‘방어적 추경’이라는 주장이다.
◆시장의 우려 “고환율과 유동성의 결합” = 하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환율’이라는 변수에 주목한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7년 만에 1500원대 선을 돌파한 상황에서 대규모 재정투입은 원화 가치 하락을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반적으로 재정 확대는 금리 상승 압력으로 작용해 통화 가치를 높이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상황에서는 재정 건전성 우려가 ‘원화 약세’를 가속화할 위험이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물가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통화긴축 기조를 유지해야 하는데, 재정은 반대로 움직이는 ‘정책 엇박자’가 나타날 수 있다”며 “풀린 돈이 고환율과 만나 수입 물가를 자극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소득 하위 70%에게 지급되는 ‘고유가 피해지원금(4조8000억원)’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정부는 이를 고유가로 인한 실질소득 감소분을 메워주는 소득 보전대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일시에 풀리는 현금은 숙박·음식 등 서비스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 코로나19 당시 재난지원금이 지급됐을 때, 외식 물가 등 근원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했던 학습 효과가 시장에 남아 있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지급 대상이 전 국민의 70%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점이 변수”라며 “이 자금이 소비로 이어질 경우 생산자 물가가 아닌 소비자 물가, 특히 서비스 분야의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국채 발행 제로’는 안정판 =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정부가 이번 추경을 위해 빚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25조2000억원에 달하는 초과 세수를 활용, 시중 금리를 자극할 수 있는 국채 발행을 차단했다.
만약 대규모 국채 발행이 동반됐다면 채권 금리 상승과 유동성 팽창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했을 것이란 지적이다. 하지만 이미 걷힌 세금을 재배분하는 방식이어서 물가에 미치는 ‘유동성 충격’은 상대적으로 덜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역시 이 점을 강조했다. 박 장관은 “국채 발행 없이 재정 건전성을 지키면서도 민생을 지원하는 ‘착한 추경’”이라며 “오히려 초과 세수 중 1조원을 국채 상환에 사용해 시장의 불안 심리를 잠재우는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추경이 물가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집행의 정밀도’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재정이 투입되는 시점과 방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경기 진작을 위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입하기 보다는, 고유가와 고물가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에너지 취약 계층과 영세 소상공인에게 자금이 집중적으로 흐르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과 보조를 맞춰 시중 유동성 추이를 면밀히 모니터링하는 정교한 ‘거시 경제 컨트롤타워’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정부의 판단대로 이번 추경이 물가 자극 없이 민생의 방파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아니면 인플레이션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결과로 이어질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