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AI시대 생존전략은 ‘기정학’이다
첨단 인공지능(AI)은 국제정치 안보 경제질서의 패러다임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기정학(Technology Geopolitics) 시대’의 도래가 그 상징이다. 지정학(Geopolitics)에 기술(Technology)을 결합한 기정학은 첨단 기술패권이 국가의 운명과 세계질서를 결정한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최근 프랑스와 폴란드 정상의 방한 외교에서는 기정학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국빈 방한 경제사절단에 프랑스 소버린AI(기술 주권)의 상징인 ‘미스트랄AI’ 최고경영자(CEO)가 포함돼 단연 눈길을 끌었다.
미스트랄AI의 아르튀르 멘슈 CEO는 삼성전자 경영진과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최고위층, 하정우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을 잇달아 만나 한국과의 AI 인프라 협력 의지를 다졌다. 여기서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11년 만의 방한이자 자신의 첫 방한인 마크롱 대통령이 AI 협력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고 있었음이 실감나게 한다.
첨단 기술패권이 국가 운명과 세계질서 결정하는 시대
지난주 폴란드 총리의 방한 역시 기정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AI가 바탕인 한국의 방위산업과 기술협력에 방한 목적을 두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군비를 확충하는 나라다. 두 나라는 방산 협력을 심화 발전시켜 나가는 동시에 에너지와 인프라, 과학기술 같은 다양한 분야로 협력을 늘리기로 했다.
글로벌 AI 쌍벽이자 G2 국가인 미국과 중국의 전략 역시 기정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발표한 9000억달러 규모의 AI 인프라 투자 계획은 기정학적 상징성이 크다. 데이터센터 전력망 원전을 아우르는 초대형 프로젝트는 전력 수요 대응이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중국과의 AI 패권경쟁을 염두에 두었다.
앞선 AI 모델을 개발하고, 강력한 그래픽처리장치(GPU) 클러스터를 보유해 대규모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국제정치 경제적 영향력과 직결된다. 트럼프의 프로젝트에는 동맹국에 AI 기술과 인프라 도입을 촉진하는 내용까지 포함돼 더욱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10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20기 4차 전체회의에서 중국이 과학기술 자강과 핵심기술 자립을 국가전략의 중심축으로 올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미국 역시 이를 중국의 산업정책이 아니라 전략적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기술패권 전쟁은 미국과 중국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최근 동남아 중동 남미 국가들도 데이터센터 유치와 전력 공급 계약을 국가 어젠다로 삼고 있다. 풍부한 에너지 자원과 지리적 위치를 활용해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기술이전과 투자를 동시에 끌어낸다. 기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외교다.
기술은 외교의 언어가 됐다. 기정학 시대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치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적절한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정학은 국가 간 경쟁과 협력을 아우른다.
미국의 AI 기술패권 전략은 미국 단독으로는 실현하기 어렵다. 한국이 파트너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한국은 그걸 더 강력한 경쟁력을 갖는 분야로 발전시키고 전략 강화에도 활용해야 한다. 제조업이 무너진 미국에선 데이터를 구할 수 없어 한국 기업들과 손잡고 싶어 한다. 철강 조선 등 한국의 핵심 제조업 현장에 AI나 로봇을 투입해 훈련하는 미국 기업들이 제법 많다고 알려졌다.
기술동맹의 정교한 활용도 필수적이다. 지난날 군사동맹이 국가 생존의 기반이었다면, 이제 기술동맹이 그 자리를 메운다. 미국 주도의 칩4 동맹과 같은 기술 연대에 참여하는 일도 국익 극대화와 리스크 관리라는 명확한 목표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초격차 기술의 국산화와 공급망 안정성 확보가 전략의 출발점
한국은 세계적 기술력을 갖고 있으나 이를 외교전략으로 조직화한 경험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적다. 일부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다뤄졌을 뿐 기술을 외교의 중심축으로 통합해 전략화하는 감각은 미흡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인도와 베트남 방문에서도 인공지능과 방산 분야 등 광범위한 경제 협력에서 기정학적 성과를 내면 좋겠다.
한국에는 초격차 기술의 국산화와 공급망 안정성 확보가 전략의 출발점이다. 정부는 전략기술에 대한 장기적 연구개발(R&D) 재정을 집중하고, 기업은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리스크를 분산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김학순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