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재고의 합리성이 낳은 시장불균형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은 안성장날의 과일을 모조리 사들여 제사도 못 모시게 하고, 말총을 매점매석해 망건 값을 폭등시킨다. 이 일화는 흔히 ‘사재기’의 전형으로 읽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공급망을 장악하고 가격을 좌우하는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오늘의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동전쟁의 장기화로 원유와 원자재 수급에 대한 불안이 커지자 기업들은 재고를 평시 대비 2~3배까지 확대했다. 과거 ‘비용’으로 여겨지던 재고가 위기 상황에서는 공급망 충격에 대비하는 ‘전략적 자산’이자 ‘생존장치’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생산중단을 막고 거래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대응이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위험을 분산하려는 것은 기업뿐 아니라 모든 경제주체의 자연스러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총량 확보’ 넘어 ‘분배의 공정성’ 담보하는 정책 필요
문제는 이러한 합리적 선택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역설이다. 모든 기업이 재고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면 실제 공급이 크게 줄지 않아도 시장에서는 품귀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수요가 인위적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가격은 상승하고, 그 충격은 소비재와 국민 생활 영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는 탐욕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의 오류’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자원 배분의 방향이다. 수급이 불안해질수록 공급은 협상력이 큰 대기업과 수익성이 높은 거래처로 먼저 향한다. 반면 식품·생활용품·의약품 용기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중소 소비재 산업은 후순위로 밀린다. 그 결과는 단순한 산업문제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물가불안과 생활불편으로 이어진다. 공급망에서 발생한 왜곡이 국민 생활의 불안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책당국의 역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시장자율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한 곳에만 개입한다’는 방향은 타당하지만, 기준이 불명확할 경우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 무엇이 필요한 영역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채 개입을 최소화하면 자원배분은 사실상 자본의 힘에 맡겨진다. 이는 의도와 무관하게 강자에게 유리한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취약한 부문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이는 평평하지 않은 운동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책은 ‘총량 확보’를 넘어 ‘배분의 공정성’을 관리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선 원자재 흐름과 재고 수준을 단계별로 투명하게 공개해 정보 비대칭을 해소해야 한다. 또한 수급불안 시에는 식품 의료제품 등 민생과 직결된 분야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원료 공급이 유지되도록 최소 배분 기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전체 물량 대비 비중은 크지 않더라도 이들 분야에 대한 안정적 공급은 체감물가와 사회적 불안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아울러 협상력이 약한 중소 제조업체를 위해 공동 구매 체계를 구축하고, 긴급 운전자금과 원자재 확보 등을 신속히 지원해야 한다. 공급 접근성 자체를 보완하지 않는 한 배분의 왜곡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는 시장을 통제하려는 개입이 아니라, 자본의 쏠림으로 인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최소한의 정책 장치다.
방치 아닌 책임 있는 관리 작동해야 경제회복력 강화돼
허생은 시장의 빈틈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지만 연암이 비판한 것은 그러한 왜곡을 방치한 사회였다. 기업의 재고 확대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불균형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다.
자본의 논리가 배분의 정의를 대체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 그것이 공정한 시장의 출발점이다. 방치가 아닌 책임 있는 관리가 작동할 때 우리 경제의 회복력도 비로소 강화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