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제조업 AI 성패’ 데이터가 좌우한다
인공지능(AI) 경쟁의 본질이 바뀌었다. 알고리즘 싸움에서 산업 현장 데이터 장악전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미국은 민간 빅테크가 흡수한 데이터와 합성 데이터로 격차를 벌린다. 중국은 데이터를 국가 생산요소로 법제화해 국가 주도 데이터 플랫폼에 집적한다. 독일은 기업 데이터는 서버에 두고 접근권만 통제하는 분산형 데이터 스페이스로 공급망 표준을 선점한다.
방식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다. 산업 데이터를 자국 중심으로 묶고 그 위에서 AI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수십년 축적된 산업현장 데이터는 한국 고유의 자산
이 경쟁이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데이터 없이는 AI 경쟁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우리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주력 업종과 소재부품장비, 뿌리산업까지 망라한 산업 전반의 데이터다. 수십년 간 현장에 축적된 이 데이터는 미국도 중국도 가질 수 없는 한국 고유의 자산이다. 산업 AI의 진정한 토대가 여기 있다.
산업통상부는 제조현장의 데이터를 한데 모아 활용하기 위해 ‘맥스(M.AX, 제조업 AI 전환)’ 얼라이언스를 가동하고 있다. 맥스가 지향하는 AI 모델이 현장에서 작동하려면 고품질 실전 데이터를 확보할 인프라도 함께 갖춰져야 한다. 현실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이 순간에도 현장 데이터가 활용되지 못한 채 소실되거나 외국 클라우드 플랫폼에 흡수되고 있다.
문제의 뿌리는 세 가지다. 첫째, 데이터 공유에 대한 신뢰가 없다. 기업은 핵심 공정 데이터가 경쟁사로 넘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기술적 신뢰를 담보할 메커니즘 없이는 자발적 공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현장 데이터의 품질이 낮다. 양은 많지만 AI가 바로 쓸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불량사례처럼 가치 있는 데이터는 부족하고, 숙련공의 암묵적 지식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부실한 훈련 데이터로는 정교한 모델을 만들 수 없다.
셋째, 부처 칸막이가 데이터를 고립시킨다. 여러 부처가 각기 다른 플랫폼과 기준으로 사업을 운영한다. 지금처럼 각자의 생태계에 갇혀 있으면 중국의 속도도, 독일의 정밀함도 따라잡기 어렵다.
우선 국가 제조 데이터 거버넌스의 제도적 기반을 닦아야 한다. 산업부가 컨트롤타워를 맡아 부처 칸막이를 허물고 산업데이터 소유권 원칙과 수익 배분 기준을 시급히 정립해야 한다. 기술표준 정립을 위해 올해 처음 시작한 ‘한국형 매뉴팩처링-X 플랫폼 표준모델 개발’ 사업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아울러 현장 데이터의 품질을 더욱 높여야 한다. 전처리 자동화 기술로 중소·중견기업의 데이터 정제 역량을 키우고, ‘산업AI 솔루션 실증사업’을 통해 축적한 업종별 데이터는 영업비밀을 제외하고 공공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숙련공의 암묵지식은 멀티모달로 기록하고 AI 학습용 데이터로 전환해야 한다. 이 암묵지 데이터야말로 미국의 합성 데이터도, 중국의 대규모 집적도 복제할 수 없는 한국의 절대 경쟁우위다.
마지막으로 데이터와 모델의 선순환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M.AX 얼라이언스 11개 분과의 실증 데이터가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투입되고, 검증된 성과 데이터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는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
데이터와 모델의 선순환 구조 갖춰야
고품질 데이터가 모델을 개선하고, 개선된 모델이 현장에서 더 좋은 데이터를 생산하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어야 한다. 우리 제조업이 수십년 간 쌓아온 공정 데이터가 사라지거나 외국 플랫폼에 흡수되기 전에 그 가치를 우리 손으로 붙잡아야 한다. 그 구심점이 ‘한국형 산업데이터뱅크’다. 흩어진 현장 데이터를 모으고, 검증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려보내는 국가 인프라. 이것이 갖춰질 때 M.AX는 비로소 국가 전략으로 완성된다. 골든타임은 길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