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성 범죄, 접근금지 조치 뒤 더 위험했다

2026-06-01 13:00:04 게재

이별·목 조름·집착 행동 반복됐지만 위험평가 반영 미흡

형사·법무정책연구원 “고위험 가해자 관리체계 필요해”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접근금지 조치가 내려졌는데도 살인은 막지 못했다. 경찰의 긴급응급조치나 법원의 잠정조치 이후에도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 이별과 집착, 반복 신고, 목 조름 같은 위험 신호가 범행 이전부터 누적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국책연구기관은 피해자 보호 중심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고위험 가해자를 선별해 집중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관계성 범죄의 위험성 평가 모델 및 차별적 대응 체계 마련을 위한 기초 연구’는 경찰의 긴급응급조치, 법원의 잠정조치나 임시조치 이후에도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이에 준하는 피해를 입은 사건들을 분석했다. 관계성 범죄는 가정폭력과 교제폭력, 스토킹처럼 친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범죄를 말한다. 보고서는 고위험 사례에서 어떤 위험 신호가 반복됐고 왜 기존 대응 체계가 이를 충분히 차단하지 못했는지 추적했다.

연구 결과 가장 두드러진 위험 요인은 결별과 외도 의심이었다. 피해자의 이별 통보와 별거, 이혼 소송, 이사, 연락 차단 등 관계 단절 시도가 가해자에게는 통제력 상실로 받아들여지면서 폭력이 급격히 심화하는 양상이 확인됐다. 범행 직전에는 흉기 위협과 목 조름, 살해 협박 등 고위험 폭력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분석 결과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살인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위험 신호가 누적되며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범죄로 나타났다.

현장 경찰관들이 꼽은 위험 신호도 비슷했다. 여성청소년 수사관과 학대예방경찰관(APO), 스토킹·교제폭력 전담경찰관 심층면접에서는 반복 신고, 신고 간격 단축, 흉기 사용, 목 조름, 정신질환, 알코올 문제, 보복성 언행, 집착 행동 등이 대표적 고위험 징후로 제시됐다.

보고서는 관계성 범죄가 일반 강력범죄와 다른 특성을 가진다고 분석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현재 또는 과거 친밀한 관계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 범죄가 장기간 은폐되기 쉽고, 피해자가 경제적·정서적으로 가해자에게 의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 번복이나 처벌불원 의사를 단순한 수사 비협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보고서는 일부 가해자가 공권력 개입 자체를 보복의 계기로 받아들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부 사건에서는 접근금지나 잠정조치, 임시조치가 오히려 보복 범행의 계기가 됐다. 가해자가 제재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며 공권력 개입을 통제력 상실의 신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공적 개입 직후를 별도의 고위험 시기로 관리하고 고위험 가해자의 재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청 집계에서도 관계성 범죄 증가 추세가 확인된다. 지난해 관계성 범죄 신고는 43만9382건으로 전년보다 23.1% 증가했다. 이 가운데 스토킹 범죄는 4만4687건으로 39.9% 급증했다. 가정폭력은 28만9368건, 교제폭력은 10만5327건으로 집계됐다.

한편 정부는 관계성 범죄 피해자 보호 강화를 위해 최근 공동대응체계를 구축했다. 전국 261개 경찰서와 여성긴급전화 1366, 가정폭력 상담소 등 189개 상담기관이 참여한다. 현재 관리 대상은 4만9906명이며 이 가운데 고위험군은 2만1423명이다.

다만 보고서는 피해자 상담과 보호를 강화하는 현재 체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피해자 지원뿐 아니라 고위험 가해자를 조기에 식별하고 집중 관리하는 기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캐나다·호주 등은 결별 과정과 강압적 통제, 반복 신고 여부 등을 종합 평가해 고위험 가해자를 선별·관리하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보고서는 현행 위험성 평가도구가 결별, 외도 의심, 공적 개입 이후 반응, 폭력의 반복성과 심화 정도 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결별 여부를 세분화하고 강압적 통제, 보호조치 위반, 공적 개입 이후 반응 등을 평가 항목에 포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반복 신고와 관계 단절 직후, 보호조치 위반 등이 확인되면 피해자 보호에만 의존하지 말고 고위험 가해자를 집중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관계성 범죄는 사적인 갈등이 아니라 반복성과 은폐성, 보복 가능성을 가진 공공 안전 문제”라며 “피해자 보호 중심 대응에서 벗어나 가해자 위험 관리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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