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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기연, 글로벌 첨단연구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
글로브박스 국산화 이후 태양전지·반도체·배터리·핵융합 산업으로 영역 확장
UAE 두바이 솔라파크 수주 발판 … 차세대 에너지·신소재 연구 생태계 선도
글로벌 첨단산업 경쟁의 본질은 결국 소재와 공정 기술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차세대 태양전지, 핵융합, 우주산업까지 미래 산업의 공통점은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국내 연구장비 기업 고려기연은 이러한 첨단산업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기반을 구축하며 존재감을 키워왔다.
1985년 설립된 고려기연은 1994년 국내 최초로 글로브박스(Glovebox)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후 진공증착 시스템과 자동화 클러스터 장비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세계 연구 현장에 한국산 연구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장비 뿐 아니라 연구환경 전체를 설계” = 이원태 대표는 17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본사에서 내일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고려기연의 경쟁력은 단순한 장비제작 능력이 아니라 연구환경 전체를 설계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글로브박스는 산소와 수분을 제거한 불활성 환경을 제공하는 장비다. 배터리 소재나 차세대 태양전지 물질처럼 대기와 접촉하면 성능이 저하되거나 안전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소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고려기연은 한발 더 나아가 글로브박스와 진공증착기, 분석장비, 자동화 로봇 시스템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하는 기술을 확보했다. 연구자가 소재 합성부터 증착 분석 검증까지 하나의 환경 안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대표는 고려기연의 또 다른 강점으로 고객 맞춤형 설계 능력을 꼽았다. 연구용 장비 시장은 일반 제조장비와 달리 고객마다 요구 조건이 다르다. 사용하려는 소재와 기판 크기, 연구 목적에 따라 장비 구조가 크게 달라진다.
때문에 고려기연 장비는 표준제품보다는 주문맞춤제작 비중이 높다. 실제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싱가포르 국립대 태양광에너지연구소(SERIS), 호주 퀸즐랜드대, 포르투갈 나노기술 및 스마트소재 응용연구소(CeNTI), 한국에너지공과대학 등 국내외 유수 연구기관에 맞춤형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페로브스카이트 공략 본격화 = 최근 고려기연이 가장 주목하는 분야는 차세대 태양전지로 꼽히는 페로브스카이트다. 현재 태양광 시장은 실리콘 태양전지가 주도하지만, 무게와 유연성, 적용 범위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반면 페로브스카이트는 건물 외벽과 자동차, 드론, 우주 태양광 패널 등 기존 실리콘 태양전지가 적용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활용 가능성이 높다.
이 대표는 페로브스카이트의 큰 장점으로 확장성을 꼽았다.
실리콘 태양전지의 이론적 효율 한계가 약 29% 수준인 반면 페로브스카이트는 다양한 파장의 빛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어 40% 이상의 효율 구현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실리콘과 페로브스카이트를 결합한 텐덤(Tandem) 구조는 차세대 태양광 산업의 핵심 기술로 꼽힌다.
고려기연은 이 분야에서 연구용·파일럿 장비를 개발하며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고려기연의 페로브스카이트 텐덤 클러스터 시스템은 단순 실험장비가 아니라 연구실 수준의 성과를 실제 양산으로 연결할 수 있는 파일럿 생산 플랫폼이다. 연구자가 공정 레시피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셀 제작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재현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이 대표는 “현재 이 분야에서 실질적인 경쟁사는 세계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두바이 솔라파크 수주…“중동 에너지전환 시장진출 교두보” = 이러한 기술력은 최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솔라파크 프로젝트 수주로 이어졌다. 고려기연은 약 250만달러 규모의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연구용 클러스터 시스템 공급 사업을 수주했으며, 연말까지 장비를 납품할 예정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수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고려기연이 연구장비 기업을 넘어 글로벌 에너지 전환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중동 국가들은 막대한 석유 수익을 기반으로 재생에너지 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특히 단순한 발전소 건설을 넘어 차세대 태양전지 기술을 자체 확보하는 데 관심을 높이고 있다.
고려기연이 공급하는 페로브스카이트 클러스터 시스템은 연구실 수준의 기술을 파일럿 생산 단계까지 검증할 수 있는 장비다. 향후 상용화 과정에서 핵심 인프라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운영될 경우 UAE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중동 국가들의 후속 프로젝트 수주 가능성도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용 장비 한 대 납품을 넘어 향후 생산설비와 공정 플랫폼 수출로 이어질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이 대표는 “이번 장비는 단순 연구장비가 아니라 향후 대량생산 가능성을 검증하는 파일럿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차세대 태양전지 시장은 향후 10년간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건물일체형 태양광(BIPV), 차량용 태양광, 우주 태양광 분야에서 페로브스카이트의 활용 가능성이 높게 평가된다.
이 대표는 “실리콘 태양전지가 할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페로브스카이트의 가치”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초경량·초박형 구조가 가능한 페로브스카이트는 우주 발사 비용 절감 효과가 커 차세대 우주 태양광 분야에서도 핵심 기술로 꼽힌다. 고려기연이 박막 증착과 자동화 공정 기술에 집중하는 이유도 이러한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기술 고도화 이끄는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 고려기연의 또 다른 경쟁력은 글로벌 공동연구 네트워크다. 일반적인 연구장비 업체가 제품 공급 후 유지보수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고려기연은 연구기관과 함께 새로운 장비를 설계하고 연구성과를 공유하는 공동개발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스페인 발렌시아대 연구진과는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장비를 공동 개발하고 있으며, 일본 규슈대에는 장비를 제공해 실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장비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에서는 박막 배터리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포르투갈 연구기관은 차세대 웨어러블 기기용 박막 배터리 연구에 고려기연 장비를 활용하고 있다. 싱가포르 국립대 태양광에너지연구소(SERIS)는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연구를 위한 클러스터 장비를 운영한다.
특히 고려기연은 해외 연구기관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기술을 고도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연구자들이 장비를 활용해 새로운 성과를 내면 그 결과가 다시 장비 개선으로 이어지고, 개선된 장비가 또 다른 연구 성과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고려기연의 토털 솔루션 장비를 활용한 연구진은 2019년 양자점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세계 최고 효율을 달성했으며, 2025년 납을 사용하지 않은 무연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세계 최고 효율 기록을 세웠다.
이 대표는 “이러한 국제 공동연구 네트워크가 중국 업체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핵융합·우주·AI 설계자동화까지 = 신사업 영역에서도 고려기연의 행보는 공격적이다. 회사는 우주산업용 달 환경 모사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으며,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에 적용되는 삼중수소 글로브박스 기술도 확보했다.
핵융합과 우주산업은 향후 수십년간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의 핵심 분야로 꼽힌다. 고려기연은 연구 환경을 제공하는 플랫폼 기업으로서 이 시장에서도 입지를 넓혔다.
최근에는 AI 기술을 활용한 설계 자동화도 추진하고 있다. 장비 설계 과정에서 반복되는 작업을 AI가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설계 효율성과 품질을 동시에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이 대표는 “향후 2년 내 설계 업무 상당 부분이 AI 기반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려기연은 2025년 22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중 수출 비중은 약 40%에 달한다.
일본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호주 인도 중동 등 전 세계에 15개 이상의 대리점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이 대표는 연간 8~10회 이상 국제학회에 참가하며 글로벌 연구 트렌드를 파악하고 있다.
이 대표는 고려기연의 향후 10년 비전을 ‘신소재·신에너지 연구 플랫폼 기업’으로 정의했다. 그는 “배터리와 태양전지, 핵융합, 우주산업 연구에 필요한 환경과 장비를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글로벌 첨단연구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밝혔다.
연구용 장비를 만드는 기업을 넘어 미래 산업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기술 기업. 고려기연이 보여주는 성장 궤적은 한국 연구장비 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