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세계 자동차산업 규칙을 바꾼다
‘저가 공세’ 뛰어넘어 개발속도·공급망·소프트웨어 혁신
스탤란티스·폭스바겐·벤츠, 중국에 핵심기술 의존 확대
중국 자동차업체들이 ‘저가 공세’만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산업의 개발방식과 공급망, 기술 생태계까지 바꾸며 글로벌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유럽시장에서는 중국 브랜드가 사상 처음 신차 판매의 10%를 넘어섰고, 유럽 완성차업체들은 협력대상으로 중국기업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최근 블룸버그가 연이어 보도한 세 편의 심층 기사에 따르면 세계 자동차산업의 경쟁구도는 ‘유럽 대 중국’이 아니라 ‘중국 중심 생태계에 유럽이 편입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유럽시장 점유율 첫 두자리 ‘11%’ = 29일 시장조사업체 데이터포스에 따르면 5월 유럽 자동차시장에서 중국 브랜드는 신차 판매의 11%를 차지했다. 중국 브랜드 판매비중이 두 자릿수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성장의 핵심은 전기차보다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였다.
중국업체들은 유럽 소비자가 아직 순수 전기차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찍 파악하고 하이브리드 중심 제품군을 빠르게 확대했다. 그 결과 중국 브랜드는 유럽 신규 하이브리드 판매의 약 20%를 차지하며 시장을 장악했다.
블룸버그는 줄리안 리칭거 데이터포스 애널리스트의 분석을 인용해 “중국 브랜드는 유럽 소비자에게 같은 가격으로 더 큰 차와 더 많은 옵션, 더 좋은 성능을 제공한다”며 “가성비(가격 대비 가치)가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중국산 MG S9 SUV는 폭스바겐 타이론보다 가격은 낮으면서 출력은 높고 품질도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부터 중국산 전기차에 추가관세를 부과했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추가관세 대상이 순수 전기차에 집중되면서 중국업체들은 관세 부담이 적은 하이브리드 판매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EU는 현재 하이브리드까지 추가관세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독일 언론 한델스블라트도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중국업체들의 가격 경쟁력은 정부 지원도 한 몫 한다. 블룸버그는 중국업체들이 보조금과 저리 금융, 저렴한 산업용지 공급 등을 통해 원가를 크게 낮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식 자동차 혁명…개발기간 절반도 안걸려 = 더 큰 변화는 판매량이 아니라 기술이다. 블룸버그는 중국 자동차산업이 자동차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표 사례가 중국 전기차 업체 리프모터다. 독일 아우토반에서 시험주행 중 소프트웨어 오류가 발생하자 독일법인은 중국 항저우에 있는 리프모터 개발진에 이메일을 보냈다. 이어 회의를 마칠 무렵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가 완료됐다.
유럽업체였다면 몇 주 걸릴 작업이 몇 시간 만에 해결된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중국 속도’(China Speed)라고 부른다. 과거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은 독일의 품질, 미국의 대량생산, 일본의 신뢰성 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소프트웨어, OTA 업데이트, 개발속도, 공급망 통합이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기존 글로벌업체가 신차 개발에 5~7년을 투입하는 동안 중국업체들은 2년 이하에 신차를 출시한다. 그 배경에는 소프트웨어 중심 개발 문화가 있다. 샤오미 샤오펑 니오 리오토 창업진 상당수가 인터넷기업 출신으로 자동차를 기계가 아닌 IT 제품처럼 개발한다. 배터리와 모터, 전력반도체, 전자제어장치 등 핵심 공급망은 한 지역에 밀집해 있어 설계변경과 양산전환 속도가 매우 빠르다. 특허에서도 독보적인 우위를 보인다.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에 따르면 2000~2023년 미래 육상교통 분야 특허는 중국이 34만3000건으로 독일의 약 5배에 달했다. 대부분 최근 5~6년 사이 집중적으로 증가했다.
◆유럽업체들 “중국 없이는 어렵다” = 블룸버그는 가장 상징적인 변화로 유럽업체들의 전략 변화를 꼽았다. 스텔란티스는 중국 둥펑자동차와 협력해 프랑스공장에서 보야 브랜드 차량을 생산하기로 했다. 또 리프모터와 협력을 확대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공장에서 중국 플랫폼 기반 차량을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향후 오펠 시트로엥 피아트 등 유럽 브랜드에도 중국 플랫폼이 적용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폭스바겐은 중국업체에 유럽공장 활용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아우디는 SAIC와 중국 전용 전기차를 공동 개발 중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지리와 차세대 전기차 협력을 논의하고 있고, 닛산은 중국에서 개발한 전기차를 중동과 남반구 시장으로 수출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폭스바겐의 올리버 블루메 최고경영자(CEO)는 “독일에서 개발하고 유럽에서 생산해 세계에 판매하는 기존 사업모델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높은 인건비와 에너지 가격, 중국시장 부진, 미국 관세까지 겹치면서 유럽 자동차산업은 경쟁력을 빠르게 잃고 있다는 평가다.
◆유럽의 딜레마…공장 유지하지만 기술은 의존 = 브랜드별 성장세도 가파르다. MG를 보유한 SAIC와 BYD가 유럽 판매를 이끌고 있으며, 체리는 오모다와 제쿠 브랜드를 앞세워 영국과 스페인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제쿠7이 5월 베스트셀링 모델 4위에 오르며 중국 브랜드 점유율을 16%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최근 유럽시장에서는 리프모터와 체리, BYD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5월 리프모터 등록 대수는 전년동월대비 465.1%, 체리는 244.1%, BYD는 136.6% 증가했다. 같은기간 테슬라도 등록대수가 107.9% 늘었지만, 르노·스텔란티스·폭스바겐은 소폭 감소한 것과 대비된다.
블룸버그는 유럽 자동차산업이 근본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중국업체를 받아들이면 공장과 일자리는 유지할 수 있지만 핵심 기술은 중국에 의존하게 된다. 반대로 중국을 배제하면 생산기지 자체가 위협받는다. 프랑스 르네공장의 한 노조 관계자는 “계속 남이 요리해 주면 결국 스스로 요리하는 방법을 잊게 된다”고 말했다.
국내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글로벌 경쟁은 개별차량 성능보다 개발속도와 소프트웨어 경쟁력, 배터리·반도체를 포함한 공급망 통합 역량이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이어 “특히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시대에는 자동차 제조기업과 IT기업간 경계가 희미해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완성차업체 역시 제조 중심 사고에서 플랫폼 중심 전략으로의 전환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