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파’ 주병기의 또 다른 도전, 대기업과 상생협력

2026-07-06 13:00:01 게재

현행법 허용 최대 과징금 물리던 ‘호랑이 위원장’, 상생 전도사로?

4대 그룹 릴레이 상생협약 주도 … 삼성·SK 이어 LG·현대차 체결

“제재만으로는 불공정 갑질 근절 한계” … 패러다임 전환 이끌까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평소 “과징금이 법 위반으로 얻은 부당이득을 훨씬 넘어서야 예방효과가 있다”며 철저한 시장규제를 강조해 온 인물이다. 또 “과징금 상향 법 개정 이전까지는 현행법이 허용하는 최대 과징금을 부과해 기업들의 공정거래법 준수를 유도하겠다”는 강력한 소신을 피력해 왔다.

이 때문에 재계는 주 위원장의 송곳 같은 법 집행을 예의주시하며 한껏 경계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그가 최근 국내 주요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1·2·3차 상생협약 체결’을 주도하면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징금 폭탄으로 대변되는 ‘원칙적 대응’과 기업들의 자발적 양보를 전제로 하는 ‘상생협력’이 그의 손에서 동시에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양날의 검과 같은 이 두 실험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학계와 재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상생협약 체결한 SK-협력사-공정위 2일 서울 중구 SKT타워에서 열린 SK-공정위 상생협약 체결식에서 안현 SK하이닉스 사장(왼쪽부터), 유원양 티이엠씨 대표, 박동석 피에스디이 대표,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협약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삼성·SK 이어 LG·현대차까지 = 공정거래위원회가 주도하는 대기업 상생협약은 지난주 4대 그룹 중 삼성과 SK가 연이어 포문을 열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공정위는 대기업의 동반성장 혜택이 1차 협력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2차와 3차 이하 영세 협력사까지 막힘없이 흘러가도록 공급망의 혈맥을 뚫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삼성이 지난달 29일 대기업집단 중 가장 먼저 물꼬를 텄다. 삼성은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등 11개 계열사가 참여한 가운데 총 3조5000억원 규모의 상생펀드와 ESG 펀드를 가동해 약 6700개 협력회사의 금융지원과 글로벌 진출을 돕기로 약속했다. 특히 2024년 11월부터 삼성디스플레이와 함께 조성한 1조원 규모의 ESG 펀드를 통해 협력사의 환경·사회적 책무 투자를 위한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는 등 실효성 있는 상생안을 내놨다.

이어 지난 2일 SK그룹이 두 번째 대규모 동반성장 조치를 단행했다. SK하이닉스, SK텔레콤 등 7개 계열사는 1조4000억원의 신규자금을 투입해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와 대금 지급 조건 개선에 나섰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내에 8700억원을 투자해 중소 협력사용 무상 테스트베드인 ‘트리니티 팹’을 구축하기로 했다. 기술 개발 실패 위험을 분담하는 ‘R&D 도전 보상제’도 신설했다. SK텔레콤 역시 마감 후 2영업일 내 대금을 100% 현금 지급하는 ‘대금지급바로 서비스’를 확대 적용해 하도급 대금 흐름을 전격 개선하기로 했다.

공정위와 대기업의 이 같은 상생 실험은 이번 주에도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공정위는 이번주에는 서울 강서구 마곡에 위치한 LG사이언스파크 ISC동에서 ‘LG그룹-1·2·3차 협력사 상생협약 체결식’을 개최한다. 이 자리에는 주병기 위원장과 LG그룹 7개 계열사 대표와 임원, 1·2차 협력사 임직원들이 참석해 상생 문화의 고도화를 선언할 예정이다. 이어서 주중 성남 판교의 더블트리 바이 힐튼에서 ‘현대차그룹-1·2·3차 협력사 상생협약 체결식’이 연이어 열린다.

현대차그룹은 역대 최대 규모인 12개 계열사가 동참해 자동차 부품 공급망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상생 방안을 발표한다. 공정위는 이번 LG와 현대차의 체결식 역시 전 과정 전체 공개 방식으로 진행한다. 공식 유튜브 채널인 ‘공정위TV’와 주 위원장의 개인 소통 채널인 ‘주병기TV’를 통해 실시간 생중계해 상생문화의 대국민 확산을 노린다.

◆왜 상생협약에 공을 들일까 = 시장 감시와 제재가 본업인 공정거래위원장이 대기업들의 자발적인 상생협약 체결식에 직접 발품을 팔며 공을 들이는 배경에는 현행 규제방식의 명확한 ‘한계’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동안 공정위는 하도급법 위반 행위에 엄정한 제재를 가해왔으나, 거래 관계의 폐쇄성과 불공정 특약, 유보금 설정 등 고질적인 ‘을(乙)에 대한 갑질’ 양상은 근절되지 않았다. 사후 적발과 제재라는 사법적 접근만으로는 산업 생태계 깊숙히 숨어 있는 영세 중소기업의 체감피해를 실시간으로 구제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진단이 작용한 셈이다.

특히 이재명정부는 ‘상생협력의 씨앗, 모두의 성장으로 꽃 피우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생태계 전반의 동반성장을 국책과제로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 위원장은 구조적 비정상을 바로잡을 열쇠로 ‘상생협력’을 선택한 셈이다.

주 위원장은 최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이론을 인용하며 “소수가 경제 발전의 이익을 독점하는 착취적 제도가 국가 실패의 원인이며, 극심한 양극화는 창조적 파괴라는 혁신의 동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강하게 지적한 바 있다.

대기업이 단기 이익을 위해 협력사를 희생시키는 과거 추격형 성장 패러다임은 더 이상 글로벌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으며, 협력사의 생산성과 창의성이 올라가야 대기업의 기술 혁신과 경쟁력도 견인된다는 선순환 논리다. 주 위원장에게 상생은 대기업의 시혜성 사회공헌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필수적 투자’이자 구조개혁의 핵심 수단인 셈이다.

◆건설업계에서 증명된 선례 = 이러한 주 위원장의 상생 실험은 제조업과 정보통신(IT) 분야에 앞서 건설업계에서 이미 한 차례 강력한 예방 효과와 실효성을 증명해 냈다. 공정위는 지난 5월 28일 전문건설회관에서 시공능력평가 상위 19개 대형 건설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건설산업 상생협력 및 공정거래 협약’을 이끌어냈다. 당시 중동전쟁 장기화 등 대외 악재로 인해 국제 유가와 시멘트 등 핵심 건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중소 하도급업체들은 연쇄부도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때 공정위가 법 위반 행위에 대한 과징금 부과 고시를 개정해 사후 적발 시 대기업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 제재 리스크를 종전보다 대폭 상향하는 압박 카드를 던졌다. 제재 리스크가 커지자 대형 건설사들은 사후 적발을 당하느니 선제적으로 자율시정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정무적 판단을 내렸고, 공정위의 중재 하에 총 1343억원 규모의 납품단가 인상 조치를 전격 확정해 순차 집행하는 성과를 냈다. 엄정한 법 집행 기조가 오히려 대기업들의 자발적 상생 참여를 유도하는 지렛대가 된 모범 사례다.

건설업계 공정거래협약 실무를 주도한 이태휘 공정위 하도급조사과장은 “앞으로 공정위의 조직과 인력이 늘어나는 만큼 기업조사가 더 강화될 것이라는 게 기업의 우려”라면서 “선제적으로 상생협약을 통해 사전예방을 하면 기업은 법률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공정위도 꼭 필요한 곳에 조사역량을 집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모순돼 보이는 ‘엄정한 규제’와 ‘자율적 상생’이라는 주 위원장의 투트랙 실험이 산업계 전반에 안착하기 위한 성공 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정교한 인센티브 구조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상생협약이 일회성 이벤트나 보여주기식 행정에 그치지 않으려면 참여 기업에 확실한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

이동원 법무법인 율촌 고문은 “공정위가 약속한 대로 공정거래협약 이행평가를 철저히 시행한 우수 기업에 하도급거래 직권조사 면제, 모범업체 지정 등의 혜택을 꼼꼼하게 챙겨야 기업의 지속적인 참여 동기가 유발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2·3차 하부 공급망에 대한 철저한 사후 모니터링’도 필요하다. 대기업이 1차 협력사에 자금과 혜택을 주더라도 1차 협력사가 이를 아래에 흘려보내지 않고 중간에서 흡수해 버리면 상생의 혈맥은 다시 막힌다. 건설업계에서 도입한 상설 ‘민관협의체’ 같은 실시간 이행 점검 시스템을 4대 그룹 공급망에도 촘촘히 이식해 상생결제 방식이 말단 영세하도급업체까지 도달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규제 강도의 예측 가능성 유지’도 필요하다. 재계가 공정위의 상생 행보에 적극 동참하는 바탕에는 역설적으로 주 위원장이 가진 강력한 ‘원칙주의자’로서의 칼날이 존재한다.

“상생 조치에는 확실한 자율시정 기회를 주되, 고의적 갑질과 불법에는 예외 없이 무관용 최대 과징금을 부과한다”는 명확한 예측 가능성이 유지될 때 비로소 대기업들이 상생협약 테이블을 가장 안전한 경영 피난처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란 지적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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