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시장 삼킨 AI산업의 파급효과
천문학적 비용 부담에 빅테크 기업 우려 확산 … 옥석 가리기 시작된 데이터센터 투자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이 뜻밖의 곳에서 소비자 물가를 밀어 올리고 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태블릿에 들어가는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면서 애플 같은 세계 최대 전자제품 기업까지 제품 가격인상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AI 데이터센터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기업용 저장장치를 빨아들이자 소비자 전자업체가 부품 조달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메모리와 저장장치 가격 상승으로 애플 제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애플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구매력을 가진 전자제품 기업 중 하나다.그런 애플까지 가격인상을 언급했다는 점은 메모리 가격 급등이 단순한 부품업계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 제품 가격으로 번지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최근 애플의 행보에 대해서는 메모리 3사(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높은 가격 부담을 제어하기 위한 부품 공급 다변화 전략의 일환으로 시장은 분석하고 있다.
메모리 사장의 우선순위 바꾼 AI산업
이번 사태의 핵심은 AI가 메모리 시장의 우선순위를 바꿨다는 데 있다. 그동안 메모리는 스마트폰, PC, 서버 수요에 따라 주기가 움직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었다. 그러나 대형언어모델을 훈련하고 실행하는 AI 데이터센터가 폭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엔비디아와 AMD의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는 대용량 HBM 없이는 제 성능을 내기 어렵다. 생산능력은 하루아침에 늘릴 수 없는데 가장 돈이 되는 AI용 메모리로 공급이 몰리면서 일반 스마트폰과 PC용 부품은 상대적으로 뒤로 밀리고 있다.
그 결과 누군가의 비용은 누군가의 초과이익이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5월 말 끝난 3분기에 순이익 282억달러, 매출 415억달러를 기록했다. 순이익은 전년 동기보다 거의 1400% 늘었고, 마이크론은 다음 분기 매출을 500억달러로 제시했다. 발표 직후 마이크론 주가는 시간외 거래에서 약 14% 급등했다.
더 눈에 띄는 숫자는 이익률이다. 마이크론의 매출총이익률은 1년 전 39%에서 85% 가까이 뛰었다. 회사는 다음 분기에 이 수치가 86%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기업들이 메모리 가격 급등에 불만을 제기하는 동시에 미국 메모리 기업은 사상급 이익을 내는 역설적 구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한국 기업들도 같은 흐름의 한복판에 있다. 국내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발 메모리 호황에 힘입어 2분기에도 역대급 실적을 낼 것으로 보고 있다. 연합인포맥스가 최근 한달 내 보고서를 낸 증권사 15곳 컨센서스를 집계한 결과, 두 회사의 2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150조원 안팎으로 전망됐다. D램과 낸드, HBM 가격이 동시에 오르면서 한국 메모리 기업도 마이크론과 마찬가지로 가격 결정력을 키우고 있다는 뜻이다.
AI 투자 사이클 승자로 부상한 메모리 3사
문제는 가격부담이 애플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사 커리스의 알렉스 볼독 CEO도 메모리 반도체 부족으로 스마트폰과 노트북 가격이 올해 말 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커리스는 9월까지 재고를 확보했지만 이후에는 가격 압박과 공급 제약이 커질 수 있다고 봤다. AI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메타 구글 아마존 등이 메모리 수요를 끌어올리면서 소비자 전자제품 공급망에 부담이 전가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수요 둔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부품값이 오른다고 전자제품 가격을 무한정 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FT는 AI 데이터센터 투자 열풍이 닌텐도와 소니의 게임기를 뜻하지 않게 사치품처럼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닌텐도와 소니는 올해 대표 게임기 가격을 올렸고, 마이크로소프트도 지난해 엑스박스 시리즈X 가격을 두차례 인상했다.
닌텐도는 부품값과 관세부담이 올해 1000억엔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올해 스위치 판매량 전망도 약 2000만대에서 1650만대로 낮췄다. 가격인상이 수요를 밀어내기 시작하면 하드웨어 업체뿐 아니라 게임 개발사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이 흐름에서 피해자인 동시에 원인 제공자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메타는 AI 연산능력과 모델 접근권을 외부 고객에게 파는 클라우드 인프라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저커버그 CEO는 5월 주주 통화에서 외부 기업들이 메타에 API 서비스나 연산능력 구매를 요청하고 있다며 “분명히 검토 대상”이라고 말했다. 메타는 메모리와 GPU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수요자이면서, 확보한 연산능력을 외부에 팔아 투자비를 회수하려는 공급자가 되려는 셈이다.
미국 빅테크의 설비투자 규모도 부담을 키운다. FT는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구글 모회사) 등 4개 기업이 올해 AI 인프라에 모두 7250억달러를 쓸 것으로 전망된다고 전했다. 이 돈은 데이터센터 GPU 메모리 전력설비 냉각장치로 흘러간다. AI가 소프트웨어 혁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도체와 전력망, 토지와 냉각 설비를 필요로 하는 거대한 물리적 투자 사이클이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AI 버블 논란도 한층 복잡해졌다. AI 투자 기대가 과열됐다는 의심은 커졌지만 메모리와 전력, 데이터센터처럼 실제로 부족한 자산의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 거품 여부와 별개로 AI 서버를 짓는 기업들은 지금 더 비싼 부품과 전기를 사야 한다. 병목을 쥔 기업들이 강한 가격 결정력을 갖는 배경이다.
데이터센터 짓기만 하면 돈되는 시대 끝나
데이터센터 투자에도 이제 옥석 가리기가 시작됐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사모펀드 블랙스톤은 버지니아 북부 데이터센터 3곳의 지분을 35억달러에 디지털리얼티에 매각하기로 했다. 이를 AI 데이터센터에서 발을 빼는 신호로 보기는 어렵다. 블랙스톤과 디지털리얼티는 다른 데이터센터 투자를 계속 함께하기로 했고, 블랙스톤은 추가로 1600억달러 규모의 투자 기회를 파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자산 매각은 데이터센터도 더 이상 “짓기만 하면 돈이 되는 자산”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 중단사례도 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블랙스톤이 보유한 데이터센터 운영사 QTS는 버지니아 프린스윌리엄카운티의 대형 데이터센터 개발계획 ‘디지털 게이트웨이’를 철회했다. 이미 지방정부 승인을 받았지만 전력 사용과 토지·물 소비, 환경영향을 둘러싼 주민 반대와 소송에 부딪혔다. 브룩필드자산운용이 투자한 컴퍼스 데이터센터도 버지니아 북부의 대형 개발계획 일부에서 물러났다. 시애틀 시의회도 6월 대형 데이터센터 신설과 확장을 1년간 막는 긴급 조치를 통과시켰다.
주식시장도 이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메타가 남는 AI 연산능력을 외부에 팔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AI 클라우드 인프라 기업 주가는 급락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메타 소식 직후 코어위브가 장중 14%, 유럽에 기반을 둔 AI 데이터센터 기업 네비우스가 17%까지 떨어졌다고 전했다.
호주계 AI 데이터센터·비트코인 채굴업체 아이렌(IREN) 주가도 최근 일주일간 약 19% 하락했다. 이들 기업은 모두 AI 인프라 수요를 성장논리로 내세웠지만 전력망 접속과 인허가, 주민 동의, 장기 고객 계약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단순 부동산 개발과 다르다.
결국 이번 메모리 가격급등은 반도체 업황 호황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AI 데이터센터가 메모리 공급을 빨아들이고, 메모리 기업은 높은 이익률을 누리며, 애플과 전자제품·게임기 업체는 가격인상과 수요둔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메타 같은 빅테크는 비용회수를 위해 연산능력 판매를 검토하고, 블랙스톤 같은 대형 운용사는 일부 데이터센터 자산을 매각하면서도 전체 AI 인프라 투자는 확대하고 있다.
AI의 다음 국면은 비용 경쟁 시대
인공지능은 인터넷처럼 공짜에 가까운 디지털 서비스로 소비자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막대한 반도체와 전력이 필요한 데이터센터가 있다. 지금 미국 기업들이 마주한 메모리 가격급등은 그 비용이 더 이상 투자자 부담으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신호다. AI 경쟁의 다음 국면은 더 똑똑한 모델을 누가 만드느냐만이 아니다. 더 비싼 메모리와 전기를 누가 감당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 비용을 소비자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되고 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