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참외 한 조각의 진화
‘가서 물외 좀 사오니라’. 어머니 말씀에 나는 고무신을 끌어 신고 10원짜리 종이돈을 받아 길을 나섰다. 밭 주인은 ‘실헌 놈으로 가득 따 담어라’ 하면서 내가 가져간 장바구니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렇게 사 온 오이는 숭숭 썰어 고추장에 버무려 먹고 미역 줄거리 들어간 오이냉국으로도 먹었지만 나는 군입 거리 삼아 생 오이를 우적우적 씹어먹곤 했다. 그때마다 입안에 가득 여름의 향기가 몰려 들어왔다.
오이의 향에는 호불호가 뚜렷해서 어떤 사람은 냉면에 고명으로 얹은 잘게 채 썬 오이 조각 하나까지 골라내곤 한다. 오이의 주된 휘발성 성분은 탄소 6 혹은 9개짜리 알데히드이다. 효소의 도움으로 조각 난 지방산이 산소와 만나 산화된 화합물이지만 그것 말고도 향기를 내는 물질은 거의 여든 가지나 된다.
하지만 사람마다 이런 향기 물질에 대한 감수성은 제각각이어서 어떤 사람에겐 입안에서 터지는 상큼한 향이 다른 사람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중국 허베이 화북이공대학교 연구팀은 박과 식물과 근연식물의 상동유전자 서열을 분석하고 이들의 계통도를 제시한 논문을 2017년 ‘분자생물학과 진화’에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박과 공통 조상에서 수박이 가장 먼저 분기해 나갔다. 지금으로부터 약 2200만~2500만 년 전 일이다. 그로부터 약 천만년이 지난 뒤 다시 오이와 멜론이 나뉘었다. 영장류 공통 조상에서 침팬지와 인간이 나뉘기 한참 전 일이다.
오이와 참외의 진화 계보
오이와 함께 여름철 서민 과일의 대명사로 군림했던 외(참외)의 사연을 좀 더 캐보자. 음식문화연구자 고영은 지금 우리가 슈퍼마켓에서 흔히 보는 참외가 오복꿀참외라고 말했다. 이들 재배종도 계보가 있어서 거꾸로 훑어가면 1985년에 흥농종묘에서 한국화한 ‘금싸라기은천’, 1975년 중앙종묘에서 개량한 ‘신은천’에 이른다. 이름에서 짐작하겠지만 신은천은 1957년 일본에서 건너온 ‘은천(銀泉)’에서 시작했다. 은천은 고대 일본의 마쿠와(makuwa) 참외에 근원을 둔다. 한국 참외의 공식 이름에 마쿠와(Cucumis melo var. makuwa)가 들어가는 이유다.
한국에서 흥한 은천은 정작 일본에서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대신 일본에서는 은회색 바탕의 두꺼운 껍질에 그물 무늬가 어지럽게 얽힌 머스크멜론(Cucumis melo var. melo)이 자리 잡았다. 단맛을 추구하는 인간의 가벼운 입맛을 맞추고자 육종가들은 늘 애를 쓴다. 참외와 멜론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은 달지 않은 수박은 찾기 힘들다. 리어카 틀에 놓인 수박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속을 파고 먹어보라 큰소리치는 설레발에 무맛 나는 수박을 사먹어본 적이 언제던가?
중국 과학자들은 단맛 유전자를 분석하고 멜론이 인도에서 두 번, 아프리카에서 한 번 독립적인 재배화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와 인도에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며 야생종이 이미 살고 있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또 다른 후보지로 호주가 가세했다.
더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이주하던 인류의 직립보행 조상이 박과 씨앗을 곳곳에 퍼뜨렸을 것이다. 유전체 분석과 인류가 머물렀던 유적지에서 나온 씨앗을 바탕으로 멜론은 약 4000년 전부터 인간 집단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의 멜론에서 단맛 유전자가 독립적으로 진화했다지만 표본 수가 적어 아직은 확고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인공선택한 멜론의 두 대표선수는 달고 샛노란 우리 성주 참외와 겉이 어지럽게 얽은 머스크멜론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주로 재배하는 참외는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몽골과 중국을 거처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반면 머스크멜론은 유럽을 거쳐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재배된다.
단맛을 키운 인간의 선택이 낳은 결과
농부들은 크고 달 뿐만 아니라 빨리 자라고 쉽사리 상하지 않는 형질을 쫓아 공들여 식물을 관찰한다. 이들 과일의 여러 표현형 가운데 과육과 껍질의 색, 수박의 어지럽고 짙은 무늬, 참외의 흰 선과 멜론의 얽은 그물은 단일 유전자 또는 몇 가지 유전자의 조절을 받는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들은 인공선택의 손쉬운 대상이 된다. 참외의 세로 선과 멜론의 얽음은 이들 식물이 빠르게 자란다는 표식이다. 빠른 성장에 뒤따르는 껍질의 파열을 막고자 일종의 봉합선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의 재배 역사에도 분자생물학적 묘미가 오롯이 드러난다. 색깔과 모양, 그리고 향기가 다를지라도 오이와 참외, 수박의 공통 조상이 지구의 토양을 수놓았을 일억 년 전의 그 여름 한때를 떠올리며 길게 썬 참외 한 조각 베어 물어본다.
김홍표
아주대학교 약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