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렬의 미국 톺아보기
미국의 통상압박 내공으로 대응하기
6월 29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의 핵심은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를 묶어 국가 산업지도를 새로 짜겠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과 SK 최태원 회장이 직접 참석해 투자 구상을 발표했다. 국정 2년차를 맞아 ‘회복’을 넘어 ‘대도약’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잠재성장률 1%대 고착을 끊고, AI 혁명을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시동 건 4700조원 AI 인프라 국가전략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첫번째 메가프로젝트로 ‘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전면에 내세웠다. 핵심은 ‘3S+1F 전략’이다. 속도전(Speed), 거점전(Stronghold), 선도전(Spearhead) 그리고 총력지원(Full Support)을 결합해 한국 반도체 산업을 다시 성장 궤도에 올려놓겠다는 계획이다. 반도체 생산능력을 5년 내 2배로 확대한다. 호남권에 800조원 규모 기업 투자를 유치해 ‘제2 반도체 기지’를 조성하고, 충청권은 HBM 후공정 생태계를 확대하며, 동남권과 대경권은 전력반도체와 소부장 혁신 거점으로 육성한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AI를 산업의 새로운 기반시설로 규정했다. 그는 “정부는 국가 전략산업으로 피지컬 AI를 육성하려고 한다”면서 “2035년까지 총 18.4GW 규모 AI 디지털센터를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반도체, AI 데이터센터에 반드시 필요한 전기와 용수를 적기에 공급해서 대한민국 대도약을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은 ‘기업형첨단도시 조성방안’을 발표하면서 “기업의 지방 투자를 지역 성장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공간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향후 10년 간 약 4700조원 규모의 초대형 투자계획이다.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이요 태양계 최대의 인공사업이다. 성공하면 한국 경제의 중심축은 수출 제조업에서 AI 인프라 산업으로 이동한다. 한국은 삼성·SK 반도체의 나라를 넘어 지구적 산업 생태계가 된다. 한국은 메모리 강국에서 AI 제조 강국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압축하면 한국은 “AI를 사용하는 나라”가 아니라 “AI 세계가 돌아가게 만드는 나라”가 된다.
이미 한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이 가진 공급망 장악력은 미국의 무리한 통상 압박이나 외교적 요구를 방어하는 강력한 ‘비대칭적 상호의존’(Asymmetric Interdependence)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실리콘 쉴드’라 한다. “우리에게 타격을 주면 미국 당신들의 핵심 산업도 함께 마비된다”는 상호취약성에 기반한 구조적 억지가 방패로 작동하는 것이다. 기술의 호르무즈 해협이다. 건드리면 자기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앞으로 10년 후 메가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한국의 ‘실리콘 쉴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핵무기급 파괴력을 갖게 될 것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중국 시장의 완전한 디커플링을 압박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 상무부가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극단적으로 강화하며, 낸드(NAND) 플래시의 약 40%를 생산하는 삼성전자 시안 공장과 디램(DRAM)의 약 40% 안팎을 생산하는 SK하이닉스 우시 공장의 가동을 전면 중단하거나 철수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중국 공장 문을 닫는 순간,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공급량의 20~30%가 증발한다. 이는 즉각적인 글로벌 메모리 폭등으로 이어지고 한국 기업에 의존하는 애플(iPhone), 마이크로소프트·구글(AI 데이터센터 구동용 서버) 등 미국 핵심 빅테크 기업들의 생산 차질로 직결된다. 미국도 이러한 상호의존 구조를 쉽게 무시하기는 어렵다.
반도체 초격차가 경쟁력이자 경제안보다
현재 삼성전자(텍사스 테일러),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오하이오, 조지아, 인디애나 등)는 미국 내에 수십 조 원 규모의 최첨단 공장을 짓고 수만 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들은 미국 대선의 향방을 가르는 핵심 경합주이자 제조업 부활을 노리는 곳들이다. 예컨대 한국은 방위비 협상 테이블에서 미국 내 첨단 투자 계획의 전면 재검토 및 고용 스케줄 연기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현지 공장 건설이 지연되면 해당 주지사들과 의원들이 표밭을 지키기 위해 백악관에 역으로 압박을 넣게 된다. 미국 정부도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예컨대 미 정부가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광물(리튬, 니켈 등)의 공급망에서 중국을 100% 배제하라는 요건(FEOC)을 유예 없이 즉각 촉구하며, 이를 어길 시 한국산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에 보조금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압박한다. GM, 포드, 스텔란티스 등 미국의 전통 자동차 거두들은 한국의 배터리 3사(LG·SK·삼성)와 합작법인을 설립해 미국 전기차 전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위기에 처한 미 자동차 CEO들은 직접 워싱턴으로 날아가 한국 배터리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미 정부에 로비한다. 미국은 그래도 버틸 것인가.
미국은 칩스법(CHIPS Act)을 무기로 인텔의 파운드리와 마이크론의 HBM을 밀어주며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의도는 명확하다. 한국 의존을 끊고 자신들이 공급망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다. 특히 마이크론이 최근 빅테크들과 장기 고정가 계약(SCA)을 체결하며 무섭게 추격하는 현 상황에서, 한국이 ‘실리콘 쉴드’의 효력을 유지하려면 미국이 단기간에 돈으로 모방할 수 없는 구조적 기술 초격차를 증명해야 한다.
한국이 당면한 핵심 과제는 고대역폭메모리 반도체(HBM)의 ‘탈(脫) 상품화’와 파운드리 융합의 완성이다. 과거의 DRAM은 가격이 맞으면 아무 데서나 사다 쓰는 범용 소모품이었지만, AI 시대의 HBM은 칩의 설계 단계부터 엔비디아 같은 빅테크와 함께 맞물려 들어가는 ‘커스텀 인프라 자산’으로 변했다. 미국(마이크론)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한 과제는 6세대인 HBM4의 주도권이다. HBM4 칩의 ‘베이스 다이’(Base Die)를 메모리 공정이 아닌, TSMC나 삼성전자의 첨단 4나노 이하 초미세 파운드리 공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술 공급망 협의체인 ‘팍스 실리카’(Pax Silica) 구상은 한국의 ‘실리콘 쉴드’ 담론과 정면으로 맞물려 있다. 한마디로 실리콘, 반도체, AI 인프라를 중심으로 미국 주도 기술 질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2025년 12월 미 국무부가 출범시킨 것으로, 현재 한국을 포함해 24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 브라질은 제외되어 있다. 그들을 겨냥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2026년 6월 워싱턴에서 열린 제2차 팍스 실리카 정상회의에서도 AI 혁신과 반도체 공급망 협력이 논의됐다. 이는 공급망 지도 작성, 정책 조율, 투자·산업단지 조성을 통해 미국 주도 기술 블록을 구체화하는 절차다. 미국은 이 다자간 협의체를 통해 한국의 독자적인 기술력을 ‘미국 주도의 안보 블록’이라는 틀 내에 제도적으로 묶어두려 한다. 한국의 ‘지렛대’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취할 것은 취하되 미국의 ‘굴레’를 뒤집어쓰면 안 된다.
기술·투자 일관성이 성패 좌우
요는 내공을 다지는 일이다. 두 가지다. 하나는 기술적 완성이다. 메가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초격차’ 즉 압도적인 기술력을 축적할 것이다. 미국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무림의 내공이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 자신감이다. 이미 우리는 반도체나 배터리 분야의 첨단 생산력과 미국내 고용창출로 미국의 급소를 어떻게 찌르는지 알고 있다. 우리 없이 미국은 생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패기로 삼을 일이다. 앞으로 10년이 가기 전에 우리의 ‘실리콘 쉴드’는 미국과 대등하게 협상할 전략적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려면 물론 앞으로 10년 이상의 정책 연속성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미국의 통상압박을 반격으로 분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