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미래, 원칙과 정도에 달렸다"

2016-11-30 10:50:28 게재

스위스은행의 무한책임

미국 은행주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된 이후부터다. 전문가들은 최근의 은행주 상승은 △2008년 이전의 느슨한 규제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감 △트럼프 정권 인수팀에 포함된 보수적 기업인과 경제학자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과감한 투자약속 덕분이라고 분석한다. 트럼프 당선자는 2010년 시행된 도드-프랭크 월가 개혁법안과 소비자금융보호국의 까다로운 행정규제를 완화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과도한 권한과 미 정부의 급증하는 부채를 고려하면, 금융업의 반짝성장은 몰라도 지속가능한 장기성장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어려울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유럽', '스위스워치' 칼럼니스트인 마르샤 크리스토프 쿠라포프나는 29일 온라인매체 미제스인스티튜트 기고문에서 "미국 금융권이 밝은 미래를 낙관하려면 '자산관리'라는 은행의 전통적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향후 수세대에 걸쳐서도 살아남을 은행은 웰스파고나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대마불사 스타일은 물론 페이스북이나 구글이 추진하는 모바일금융업도 아니다"라며 "가장 탄탄한 은행은 시간이 흘러도 전통과 원칙을 고수하는 소수의 스위스 민영은행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국적 회계감사기업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가 최근 "전통은행은 2025년 이후 자취를 감출 것"이라는 암울한 예상을 내놨지만, 쿠라포프나의 시각은 다르다. 지난 10년 동안 최고의 수익률을 냈지만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행, 미래의 지배적인 모델이 될 수밖에 없는 은행은 전통과 원칙을 지키는 스위스의 은행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스위스프라이빗뱅커란 = 그에 따르면 은행업 전통 원칙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원조모델은 스위스의 전설적인 무한책임은행이다. 미국은행 가운데 이같이 엄격한 스위스모델을 따라하는 곳은 없다. 쿠라포프나에 따르면 스위스 제네바나 취리히, 바젤 등에 위치한 소수 전통은행들의 자산관리 요령은 △짐수레말처럼 부지런히 일할 것 △불필요한 장식과 가식을 생략할 것 △돈을 금처럼 귀한 의미를 갖는 대상으로 다룰 것 등이다. 이들 은행의 시각에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돈풀기 통화정책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정책이다.

이들 은행을 파악하려면 우선 뜻의 정의부터 살펴봐야 한다. '스위스프라이빗뱅커'(Swiss private banker, SPB)는 '민간은행'(private bank)이나 '개인금융'(private banking)이 아니다. 1934년 입안된 스위스법에 따른 특정 금융기관을 가리킨다. 즉 SPB는 등록상표다. 스위스에 본점을 둔 다국적은행 UBS나 크레딧스위스 스타일의 은행도 아니다. UBS와 크레딧스위스는 내용과 지향목표 측면에서 사실상 미국식 은행이다. SPB는 정체를 숨기고 고객들의 탈세를 돕는 악명높은 조세피난은행은 더더구나 아니다.

SPB는 엄격하게 정의된 소수 특권층 금융명문가로, 수세기의 전통 속에 가족이 대대로 가업을 잇는 은행을 말한다. 이 명칭을 붙이려면 법에 명시된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동업자에 대해 개인적으로 무한책임을 지는 전대미문의 조건, 둘째 엄격하게 높은 자본확충 기준이다. 지난 3년으로 좁혀 보더라도 이같은 기준을 충족시킨 은행이 12곳에서 6곳으로 줄었다. 글로벌 경제위기 충격이 지속되면서 12개 중 6곳이 유한책임은행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한책임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6개 은행은 바우만과 보르디에, 구츠빌러, 무즈달그, 란&보드너, 라이히무트다.

SPB의 특징은 첫째 동업이라는 법적 형태로 조직된다. 둘째 대부분 설립자의 가업을 잇는 자손이 운영한다. 셋째 자기자본으로 투자하고 현금보유비중이 높다. 넷째 고객 투자실적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경영진을 두고 있다. 네번째 특성이 일반 은행과 다른 결정적 차이다. 기타 스위스 은행들도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법적 책임의 최고한도는 자본금으로 한정된다. SPB의 경우 그 책임은 회사 자본금에 제한되지 않고 동업자들이 개인재산을 담보로 무한 책임을 진다. 요즘 시대엔 상상하기 힘든 방식이다.

이들 SPB는 수평적 경영지배 구조를 갖고 있다. 의사결정 과정도 단순하다. 은행의 고유한 투자상품을 개발하지 않는다. 따라서 투자 조언과 관련해 이해상충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고객은 투자금을 언제나 원하는 즉시 유동화할 수 있다. SPB는 중개인처럼 행동하지도, 온라인업무를 수행하지도 않는다.

요즘 시대엔 상상하기 힘든 은행 = SPB는 기본적으로 실물자산에 대한 투자를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스위스 방식의 자산투자 철학을 따른다. 금이나 원자재 기반 산업, 예술작품과 토지 등에 투자한다. 스위스에서 현금은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이들에게 채권은 빚이지 자산이 아니다. 파생상품이나 카지노 투자는 금기시된다. 이들 은행 대부분은 상업대출이나 부동산담보대출을 하지 않는다. 투자 판단은 언제나 과거 실적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제네바에 위치한 SPB연합회는 "과거부터 SPB에 대한 신뢰는 지대했다"며 "많은 이들이 국왕이나 장관의 금융자문을 맡았고, 일부는 직접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고 자랑한다.

앨버트 갤러틴은 19세기 루이지애나주 매입과 관련한 자문을 한 덕에 미국 재무장관이 됐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은행가 집안의 조지 프레보스트는 캐나다 총독을, 피에르 텔루손은 영국중앙은행장을, 자크 네커는 프랑스 루이 16세 치하에서 재무장관을 맡았다. SPB의 동업관계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것은 가업의 영속성 관점에서 대단한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기술과 고객, 규제가 금융업의 변화를 주도하는 세 가지 요인이다. 거세지는 변화의 바람으로 전통 은행모델이 위기에 처했다. 은행의 미래라고 자부하는 핀테크기업들은 전통금융이 수행했던 모든 분야를 잠식할 태세다. 무선광대역 인터넷망을 이용하는 모바일뱅킹의 급속 확산으로 지점을 갖춘 전통 은행모델은 도전받고 있다. 반면 핀테크 금융기업들은 보안과 관련한 불신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쿠라포프나는 "이같은 환경에서도 SPB는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성장하고 있고, 여전한 명성을 자랑한다"며 "SPB의 경험과 신뢰, 이미지 모두 핀테크기업이나 대마불사은행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그는 "미국 금융산업의 미래는 좋은 전통을 이어가는 SPB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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