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포용금융, ‘시혜’에서 ‘시장’으로
최근 우리 금융권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포용적 금융의 확대다. 은행권의 상생금융 기여도가 강조되고 생산적 금융과 관련한 정부 정책이 쏟아지는 현상을 보며, 필자의 머릿속에는 20년 전 방글라데시 출장길에서 목격했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당시 그라민뱅크에서 확인한 것은 첨단 금융 시스템조차 해결하지 못한 정보 비대칭성을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으로 극복해 내는 현장이었다.
경제학적으로 금융 거래의 성패는 차주의 보이지 않는 역량과 상환 의지를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은행은 이를 위해 신용점수라는 대리변수를 활용하며 적지 않은 정보 획득 비용을 지불한다.
수익성이 낮으니 민간 은행은 자연스럽게 취약계층 대출을 기피하게 되고, 이는 시장의 실패로 이어진다. 그라민뱅크는 이 난제를 이웃끼리 자발적으로 형성한 계(契) 형태의 공동체 모델로 풀어냈다. 서로를 잘 아는 주민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직접 선별해 정보 비용을 낮춘 것이다.
디지털 인프라와 새로운 신뢰, 그라민 뱅크의 해법
하지만 현대 도시사회에서 이러한 공동체 기반의 신뢰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하기란 곤란하다. 따라서 이제는 그 역할을 디지털 데이터와 정교한 인프라가 대신해야 한다. 정부가 전문개인신용평가(SCB) 도입 등 대책을 준비 중이라고는 하나 대책의 존재 자체가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핵심은 이러한 인프라가 민간시장에서 실효성 있게 작동하며 금융회사들이 자발적으로 대출에 나설 수 있게 만드는 질적 고도화에 있다.
정부의 대책이 단순히 공급물량을 채우기 위한 행정적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본질적 목적은 퇴색된다. 포용적 금융은 민간이 진입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정책금융이 먼저 데이터를 축적하고 우량 차주를 식별해 내는 R&D 플랫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여기서 축적된 데이터가 민간의 수익모델로 연결될 때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열린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은 정책금융이 가져오는 낙인효과와 도덕적 해이다. 취약계층의 금융 취향이나 선호는 일반 소비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부채탕감을 넘어 자산을 형성하고 리스크를 관리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서민금융은 수요자의 주체성을 외면한 채 시혜적 대출이라는 틀에 갇혀 공급자 중심의 물량 확대에 치중되어 있다.
이처럼 수요자의 보편적 니즈를 무시한 채 특수 지원에만 치중할 때 정책금융은 오히려 예비 우량 차주들을 밀어내는 역설을 낳는다. 정책 지원이 재기의 발판이 아니라 금융 부적격자로 분류되는 낙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결국 포용금융이 시혜의 영역에 머무는 한 취약계층은 시장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정책 울타리 안에 갇힌 수혜자로 남는다. 동시에 정교한 선별장치 없는 공급은 상환의지를 약화시키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온다. 따라서 정책금융은 차주의 재기 의지와 미래소득 흐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평가 모델을 갖춰야 한다. 이를 통해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과 재기의지가 확고한 사람을 변별해 낼 때 낙인효과와 도덕적 해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민간이 작동할 신용 인프라 구축해야
결국 포용금융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민간 금융사가 이들을 수익이 날 수 있는 잠재 고객으로 인식하고 상품 개발에 나서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금융회사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공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정책기조가 바뀌는 순간 서민금융의 안전망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생산적 금융 역시 이들이 민간시장의 우량고객으로 전이되는 졸업모델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 포용금융 정책의 진정한 성공지표는 공급액이 아니라 제도권 금융으로 복귀한 졸업생의 숫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