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금융 혁신아이콘 '씨티' 해체 가속

2022-02-21 11:39:17 게재

ATM·신용카드·전자결제 앞장서 도입 … 경쟁 뒤처지고 수익 줄면서 잇따라 매각

씨티그룹의 소매금융사업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다. 1년 전인 2021년 2월 씨티그룹 CEO에 오른 제인 프레이저가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전세계 주요 국가의 소매금융 사업에서 연이어 손을 털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는 "전세계 대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씨티은행의 독특한 파란색 로고는 코닥의 검은색과 노란색, 빨간색의 로고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흔적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영국 런던 금융가에 위치한 씨티은행 지점 앞을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씨티은행은 수십년 동안 글로벌 소매금융 강자로 명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젠 대기업과 중기업, 백만장자 등을 대상으로 한 기업금융과 자산관리 서비스에 집중할 계획이다. 물론 소매금융 자체를 없애는 건 아니다. 씨티는 뉴욕이나 캘리포니아 등 몇몇 국내 시장에 집중할 계획이다.

씨티의 사업 매각 소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호주 소매금융 사업을 내셔널오스트레일리아은행에 매각했다. 10월엔 한국 소매금융시장에서 철수했고, 12월엔 필리핀 사업을 필리핀유니언뱅크에 매각했다. 지난달에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소매금융 사업을 싱가포르 유나이티드 오버시즈 뱅크(UOB)에 매각했다. 또 씨티의 대만 소매금융 사업도 또 다른 싱가포르 은행 DBS에 팔렸다.

가장 크고 중요한 시장 중 하나인 인도에서도 곧 매각 뉴스가 나올 전망이다. 씨티은행은 인도에서 오랫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인도 3위 민간은행인 액시스뱅크가 씨티의 소매금융을 약 25억달러에 사들일 것이 확실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폴란드 바레인의 소매금융 역시 매각 협상이 진행중이다. 최근엔 100% 지분을 보유한 멕시코 3위 바나멕스은행도 매각 리스트에 올랐다. 씨티그룹은 매각이 지연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임직원과 고객이 다른 안정적인 은행을 찾아나서기 때문이다.

씨티의 퇴각은 유일한 게 아니다. 소매금융 시장에서 씨티와 비슷한 글로벌 야심을 가졌던 HSBC도 사업을 대폭 축소했다. 호주뉴질랜드은행도 6년 전 범아시아 확대 전략을 포기했다. 씨티와 마찬가지로 이 은행들은 대출이나 투자 서비스 등 기업고객을 위해 글로벌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씨티의 퇴각을 소매금융 시장을 지배하려다 실패한 또 다른 사례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씨티의 퇴각은 두가지 측면에서 과거의 실패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글로벌 확장을 위한 절대적 야심, 또 다른 하나는 씨티가 전세계 소매금융시장에 남긴 유산이다.

씨티의 확장은 글로벌 금융에 대한 생각의 전환을 바탕으로 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곳의 모든 이에게 모든 방법으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씨티의 글로벌 전략은 자국 내에서 맞닥뜨린 문제점을 해결하는 취지였다. 1970년대 은행에 대한 강한 규제로 씨티의 소매금융 네트워크는 뉴욕시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수익성이 낮았고 원하는 기업들에게 자금을 대출할 여력도 없었다.

당시 씨티의 중역이었던 존 리드는 7쪽짜리 글에서 "씨티에게 두가지 길이 놓여 있다"고 썼다. 한가지 길은 씨티가 소매금융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도이체방크에 인수된 뱅커스 트러스트나 뉴욕은행, 보스턴의 스테이트 스트리트 은행 등이 취한 방법이다. 다른 옵션은 반대로 덩치를 엄청나게 키워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리드는 글에서 "소매금융은 단지 예적금과 대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모든 재정적 필요, 수요에 해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라고 강조했다.

씨티는 한 시장에서 개발한 솔루션을 다른 시장들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며 이를 '성공의 이전'(success transfer) 전략으로 불렀다. 이를 통해 자족적인 지역은행이 가질 수 없는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냈다. 씨티는 이에 걸맞은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씨티는 잠들지 않는다'(Citi Never Sleeps)였다.

새로운 형태의 소매금융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수년 동안 막대한 손실을 감내했다. 지금은 당연시 된 많은 금융혁신 사례가 씨티 덕분에 탄생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현금자동인출기(ATM)와 신용카드, 전자결제 등이다. 씨티는 미 전역에 대규모로 ATM을 도입했고, 전세계 은행 중 신용카드를 가장 많이 발급했으며, 소매금융 고객들에게도 전자결제 서비스를 제공한 첫번째 은행이었다.

금융기술에서 앞선다는 씨티의 명성은 1990년대로 이어졌다. 당시 씨티의 100만명 이상 고객들은 반년마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용 플로피 디스크를 받았다. 이를 통해 초기 인터넷 뱅킹을 이용했다. 지점 방문과 달리 온라인 뱅킹에선 본인확인 문제가 불거진다. 이를 위해 씨티는 안면인식과 망막스캔 기술을 실험했다. 요즘엔 보편화된 기술이다.

씨티는 이런 혁신을 무기로 글로벌 확장을 시도했다. 리드가 1984년 씨티의 CEO가 되면서 광범위한 시장들이 열렸다. 영국 런던과 스위스 제네바는 물론 나이지리아와 스웨덴 태국에 입성했다. 씨티은행은 중국 베이징에도 지점을 열었다. 지점들을 늘리면서 미국 실리콘밸리와 필리핀 인도 등에 콜센터와 혁신센터 등을 뒀다. 씨티는 특히 인도의 글로벌 기술 아웃소싱 산업을 싹 틔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씨티의 과감한 추진력은 스마트한 인물을 끌어들이는 자석이었다. 파키스탄의 전직 총리와 현직 재무장관, 필리핀 전임 중앙은행 총재 등이 씨티 출신이다. 그리고 전세계 수많은 금융기관들의 차세대 리더 역시 씨티 출신이 많다. 자산 규모로 인도 최대 민영은행인 HDFC은행과 싱가포르 DBS은행의 현 CEO는 씨티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스타 금융인이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성공의 이전' 전략은 씨티의 글로벌 성공을 견인했지만 반대로 취약성도 키웠다. 이 전략은 결국 씨티의 앞길을 막을 유능한 경쟁자들을 키워냈다. 또 각국의 금융당국은 자체적인 방어막을 쳤다. 외국계 은행이 지점을 열거나 국제계정을 연결시키는 권리를 제한했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리드가 2000년 씨티를 떠나면서 기술혁신도 무뎌졌다. 씨티 출신 금융인들이 운영하는 기업들이 씨티의 혁신사례를 모방했다. 씨티보다 더 나은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아니면 고객들에게 더욱 저렴한 서비스를 공급했다.

그리고 나서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씨티가 보유한 3000억달러 이상의 위험자산에서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결국 씨티는 미국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위기 재발을 위해 미국은 엄격한 은행 규제정책을 내놓았다.

글로벌 강자였던 씨티그룹의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독일 소매금융 사업은 일찌감치 접었다. 그리고 터키와 브라질 이집트 등 10여개의 국가에서 벌이던 소매금융시장에서 철수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시티의 위상 추락은 금융계의 국제연합(UN)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았다"고 지적했다.

아시아와 멕시코 소매금융사업은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아시아 사업 성과는 충격적으로 저조했다. 매각 대상에 오른 아시아 각국의 소매금융사업 이익은 2021년 씨티그룹 전체 이익의 1.6%에 불과했다. 때문에 씨티의 사업매각에 스탠더드차터드나 HSBC 등 주요 글로벌 은행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씨티그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JP모간체이스 CEO 제이미 다이먼은 몇년 전 씨티의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 전략을 따라할지 고민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글로벌 금융계의 새로운 골리앗으로 등장한 중국 은행들 역시 해외 소매금융 네트워크 구축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씨티의 신임 CEO 프레이저가 소매금융 해체를 밀어붙이고 있지만 씨티가 주도한 금융혁신 사례는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보편적으로 흡수됐다. ATM과 신용카드는 오래 전부터 일반화됐다. 또 싱가포르의 그랩이나 중국의 앤트그룹, 영국의 와이즈 등과 같은 핀테크 기업들은 씨티가 선도적으로 도입한 전자결제와 송금 서비스를 완벽하게 업그레이드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씨티의 굴곡진 경험은 글로벌 금융의 혁신 혜택이 특정 은행의 전유물이 아니라 금융시스템 전체에 골고루 돌아가는 것임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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