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법무부·SEC, 시장조작 집중 겨냥
2022-05-09 11:04:12 게재
수사 착수와 마무리 쉽고 빠르게 … 수사관 증원에 벌금액도 대폭 늘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BBW)는 최신호에서 "바이든행정부는 화이트칼라 금융범죄 근절에 적극성을 띠고 있다"고 전하면서 대표적 사례로 빌 황 사건을 지목했다. 한국계 투자자 빌 황은 지난해 주요 투자은행에 100억달러(약 12조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혔다.
BBW에 따르면 황씨가 구성한 변호인단은 지난달 그의 범죄혐의를 소명하기 위해 뉴욕남부지검을 방문했다. 변호인단은 검찰과 이야기가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해였다. 만남 48시간이 채 안된 4월 27일(현지시각) 새벽, 연방수사관들이 황씨 등에 대한 11개의 중범죄 혐의가 적힌 체포영장을 들이밀었다. '부패 및 조직범죄 처벌법'(RICO법)상 혐의도 포함됐다. 당국은 황씨가 은행들을 속였고 주가를 조작했다고 보고 있다.
황씨의 변호인단은 즉각 "황씨를 체포까지 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었다"며 "황씨는 지난 수개월 동안 자발적으로 수사기관 조사에 성실히 응했다"고 비난했다. BBW는 "황씨 사건은 월가의 의심스런 거래에 대해 연방정부가 적극 수사로 전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바이든행정부 화이트범죄 엄단 방침
바이든행정부는 지난해 화이트칼라 범죄를 적극적으로 단속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일부 공개한 정책 변화방향에 따르면 범죄조사를 더 쉽게 시작하고, 더 빨리 끝내며, 처벌은 더 높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 법무부는 직원과 고객의 시장조작 행위를 적발해 고발하라며 월가에 대한 압력을 높였다. 검찰은 당초 갱단과 폭력배들을 단속하는 강력한 연방법인 'RICO법'을 활용해 월가 증권중개인들을 겨누고 있다. SEC는 거액의 벌금을 물도록 민사처벌을 강화했다.
하지만 월가는 아직 정부의 방향전환을 인식하지 못한듯 보인다는 지적이다. 황씨의 변호인단은 지난 수개월 동안 "황씨의 개인운용사 '아케고스 캐피털 매니지먼트'는 합법적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리사 모나코 법무차관은 지난달 뉴욕남부지검이 13개월에 걸쳐 수사한 황씨 사건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수사기간 13개월은 월가 금융사건치고는 이례적으로 신속한 기간이다. 월가의 범죄 용의자들은 종종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변호인단을 구성해 수사 시간을 지연시킨다. 모나코 차관은 수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법무부가 최우선사안으로 여겨야 할 종류의 범죄"라며 "앞으로도 법무부는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방수사관들은 막후에서 수십곳의 은행과 투자사는 물론 이들 기업의 CEO들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황씨 사건과 별개로 기타 포괄적인 범죄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뉴욕 남부지검 데미안 윌리엄스 검사는 황씨에 대한 기소내용을 발표하면서 "난파선을 샅샅이 뒤졌고 모든 조각을 맞췄다. 의심스런 거래를 확인했고 오늘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미 당국의 금융범죄 수사강화 움직임은 지난해 11월 처음 포착됐다. 당시 모간스탠리는 블록딜로 불리는 대규모 거래를 책임진 핵심 CEO 한명에 갑작스레 휴가를 허용했다. 이후 법무부와 SEC가 월가 금융기업 CEO들의 대화 등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주가를 조작하기에 충분한 블록딜을 헤지펀드들에게 귀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수사였다. 모간스탠리는 "수사기관에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12월엔 공매도와 관련해 법무부가 월가 주요 인사들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법무부는 수십곳의 투자회사와 금융리서치회사, CEO들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수사내용은 공매도와 주가조작, 내부자거래에 누가 얼마나 어떻게 연루됐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지난달엔 SEC가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의 부적절한 행동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최근 수년 동안 SPAC과 관련한 대규모 자금이 금융시장에 쏟아졌지만 주요 수사대상은 아니었다. SEC는 SPAC이 발행한 신주인수권에 초점을 맞춰 수사중이다. BBW에 따르면 SPAC이 특정기업을 인수하기로 합의한 시간에 앞서 해당 SPAC의 신주인수권 거래가 급증했다. 그 결과 해당 SPAC 주가와 신주인수권 가격이 치솟았다. 수십건의 사례에서 이같은 패턴이 확인됐다.
법적 회색지역 적극 공략
BBW는 "최근 법무부와 SEC의 각종 조사엔 '과거 당국이 집중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법적 회색지역'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며 "일부 트레이더들은 이를 '집행에 의한 규칙 제정'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즉 이전에 간과했던 월가의 거래행태를 법의 심판대에 올려 옳은지 그른지 제대로 따져보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법무부 2인자인 모나코 차관은 화이트칼라 범죄를 방어하는 변호사들을 상대로 "검찰은 범죄수사를 위해 은행 등 금융기관에 더 많이 의존할 것"이라며 "은행은 직원이나 고객의 범죄를 정부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나 현재나 은행들은 입수한 비위를 정부에 고발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그같은 일은 드물었다 .
하지만 몇년 전부터 법무부는 은행들을 강제할 큰 지렛대를 얻게 됐다. 잘못을 저지른 은행을 상대로 불기소 또는 기소유예 합의를 해주면서 진행중이거나 곧 진행될 수사에 적극 협조하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이는 은행이 법무부의 시장정보원이 된다는 의미다.
모나코 차관 연설 즈음, 법무부는 도이체방크를 비롯한 몇몇 은행에 기소유예 합의를 위반할 리스크가 크다고 경고했다. 도이체방크의 경우 자산관리 자회사가 ESG 투자상품 일부의 환경·사회적 신용을 과장한 사실을 내부고발자가 제보했는데도 이를 법무부에 알리지 않은 것.
기소유예 합의와 관련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주요 은행들이 최근 당국의 수사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목을 끌고 있다. JP모간체이스는 올해 1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에 앞서 저명한 고객이 내부자거래를 할 가능성이 크다고 당국에 알렸다.
2월엔 빌 황 사건으로 큰 손실을 입은 크레디트 스위스가 뉴욕 남부지검 검사들에게 아케고스 거래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모나코 차관은 또 일부 은행에 "앞으로 기소유예 합의를 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합의를 받아들일지를 놓고 현재는 최근 또는 관련된 전과기록만 고려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형사와 민사, 규정 위반 등 은행의 전 기간 전체 전과기록을 놓고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RICO법은 전통적으로 법무부가 마피아 두목과 마약갱단을 잡아들이기 위해 활용한 법이다. 1989년과 1990년대 초 굵직한 월가 금융사기 사건에서 잠깐 활용된 바 있다. 그러다 30년 가까이 지난 2019년 워싱턴 검찰이 JP모간 귀금속 거래데스크 직원들을 기소하기 위해 이 법을 다시 꺼냈다. 시장참가자들을 속이기 위해 범죄기업과 협력했다는 혐의에 이 법을 적용했다.
BBW는 "빌 황 사건 수사에도 RICO법이 등장했다"며 "바이든행정부가 RICO법을 자주 활용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SEC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은행들은 직원의 애플리케이션과 이메일, 휴대폰 메시지 등의 통신자료를 보관할 의무가 있다. 이런 자료는 범죄수사에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월가 은행들은 이 의무규정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JP모간은 2018년 1월부터 2020년 11월까지 직원들의 통신자료를 누락했다. SEC는 거액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다짐했다.
사기사건 아닌데 이례적 많은 벌금
지난해 12월 SEC를 방문한 JP모간 법무팀은 해당 규정 위반에 따른 역대 벌금액 규모 자료를 들고왔다. 역대 최고액 벌금은 2000만달러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SEC는 1억달러 이상의 벌금을 요구하며 팽팽한 긴장을 연출했다.
트럼프행정부 당시 SEC 규정은 다소 느슨하게 적용됐다. 하지만 1년여 전 바이든정부가 임명한 SEC 게리 겐슬러 위원장은 원칙대로 한다는 입장이다. SEC 거버 그루얼 집행국장은 JP모간 법무팀에게 "과거의 벌금 규모로는 은행들의 잘못을 고치지 못했다"며 "나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JP모간은 1억2500만달러 벌금을 냈다. 역대 최고액이다.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도 JP모간에 추가로 7500만달러 벌금을 부과했다. JP모간이 낸 벌금은 모두 합쳐 2억달러에 달했다.
이 사례는 화이트칼라 범죄를 방어하는 변호사들을 놀래켰다. 일반적으로 사기사건이 아닌 법 위반행위에 대해선 약소한 벌금이 부과됐기 때문이다. SEC는 현재 골드만삭스와 씨티그룹을 포함한 여러 월가 은행들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듀크대 로스쿨 교수로 증권거래 감독 전문가인 제임스 콕스는 "위원장부터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며 "직원들은 위원장이 든든한 뒷배라고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SEC는 조사의 신속성도 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웰스 노티스'(Wells Notice)에 제한을 두는 방안이다. SEC가 민사소송의 대상이 될 기업에 해명을 요구하는 사전 통지서를 말한다. 과거엔 웰스 노티스 기간에 제약이 없었다. SEC는 6개월 제한을 둘 방침이다.
일부 변호사들은 고객들에게 수년이 걸릴 수 있는 법정싸움을 준비하는 게 낫다고 조언한다. SEC 역시 이에 대비하고 있다. SEC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다음 회계연도에 소송업무를 맡을 30여명의 직원을 추가 모집한다. CFTC에서 일했고 현재는 로펌 '맥고니글'의 회장인 리즈 데이비스는 "겐슬러 위원장은 공격적인 규제자"라며 "수사와 소환이 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그리고 벌금은 대폭 늘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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