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⑦ 청의 내정간섭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전권공사 파견 놓고 청과 힘겨루기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이후 1882년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英國 1883년) 독일(德國 1883년) 러시아(俄國 1884년) 이탈리아(義國 1884년) 프랑스(法國 1886년) 오스트리아(澳國 1892년) 벨기에(白國 1901년) 덴마크(丹國 1902년) 등의 국가와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한편 1886년 4월 청국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 리홍장(李鴻章)은 조선의 외교고문관으로 오웬 데니(O.N. Denny)를 추천해 조선에 대한 속방정책 강화를 꾀한다. 그러나 데니는 청국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주변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의 주권이 위협받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고종에게 외교관계 다변화와 자주외교를 제안한다. 그는 상호주의원칙에 따라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 및 유럽 국가에 상주공사관을 개설함으로써 조선이 주권을 지키고 내정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고종은 우선 청국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1887년 5월 16일(양력 7월 6일) 주일공사로 민영준을, 참찬관으로 김가진을 임명해 파견한다. 청국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1887년 6월 29일(양력 8월 18일) 미국 전권공사로 박정양을,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를 관할하는 주유럽 5개국 전권공사는 심상학을 임명한다. 심상학이 후에 신병문제로 사직하자 조신희를 임명·파견한다.
고종은 미국에 부임할 전권공사 박정양과 참찬관 이완용, 외무비서관으로 미국인 알렌(H. N. Allen)을 포함한 모두 11명을 임명하는데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큰 부상을 당한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한 의사로 이후 고종의 어의를 지낸 인물이다.
미국과 유럽 국가 전권공사 임명 소식을 접한 위안스카이는 리홍장에게 대책을 보고하고 승인받는데, 그 대책은 "각국에 파견된 조선공사는 청국공사에게 상급 관청에 보내는 공문인 정문(呈文)을 사용하고, 관원의 위계 및 직명 등을 기록한 함첩(銜帖)을 사용하고, 청국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비답을 내릴 때 쓰는 글씨인 주필(朱筆)로 조회하게 하는 등 '삼조'(三條)를 내세운다. 이는 조선과 청국 간의 전통적인 화이질서(華夷秩序)에 기반한 '속국 체제'를 상징하는 의례적 요소로서 정문 함첩 주필 등을 이용해 조선공사와 청국공사 사이의 위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양국의 위계질서를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런데 위안스카이는 곤도 마스키 일본공사, 워터즈(Thomas Watters) 영국총영사, 크리엔(Ferdinand Krien) 독일총영사를 만나면서 주미공사관 파견을 저지하는 쪽으로 바뀐다. 일본 영국 독일의 총영사는 조선이 '전권공사'를 파견하는 것이 "중국의 체면에 크게 방해가 된다"며 파견을 금지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영국 총영사는 "만약 전권공사가 부임한다면, 서양인들은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 아니라고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청국의 간섭을 지지했고, 일본도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국의 우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러시아 견제를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기에 조선의 독자적 움직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9월 18일 위안스카이는 리홍장의 동의를 얻은 이후 조선에 다음과 같은 조치를 요구한다. 첫째, 조선이 사전에 북양대신 리홍장과 상의하지 않고 전권공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 즉 조선이 청국의 사전동의 없이 외교행위를 한 것에 대한 비난과 둘째, 조선은 전권공사를 유럽에 파견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무리해서 파견하는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힐문을 한다. 그중에서도 조선이 청국의 동의를 얻지 않고 사절을 파견하려 한다는 점에 더 초점을 맞췄다.
9월 19일 영의정 심순택에게 보낸 서한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자기 생각을 내비친다. "제국(諸國)에 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이미 곧 출행하려 하지만 미리 본분에 따라 리홍장께 상의하여 요청하지 않았으니 어찌된 영문입니까? 조선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것입니까, 아니면 의도치 않게 그리된 것입니까, 아니면 달리 듣고 본 것이 있어서 그리한 것입니까?" 그는 조선이 다른 나라에 사절을 파견하기 전에 북양대신 리홍장과 상의하고 요청하는 것이 조선이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 내'의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조선은 위안스카이에게 조회를 보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종래 조선에서 해외로 사절을 파견한 사례들을 살펴보건대, 모두 한편으로 파견을 보내면서 한편으로 자문(咨文)을 보내었으며, 먼저 자문을 보내고 나중에 파견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전권공사를 간택하여 미국과 일본 등에 파견했을 때, 모두 출발한 후에 비로소 자문을 보내었습니다. 금년에 판리대신을 파견하여 일본에 주재시킬 때도 역시 출발한 후에 비로소 자문을 보내었습니다. 이번에 미국으로 가는 전권사행 역시 마땅히 기존의 사례에 따라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은 위와 같이 관례를 위반한 것이 없다고 반박했으나, 위안스카이는 과거 미국에 파견한 전권공사는 잠시 파견한 보빙사(報聘使)였고, 일본에 보낸 전권사절은 갑신정변의 선후 처리를 위한 사절로서 해당국에 주재하는 전권공사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번에 파견한 일본 주재 전권공사 민영준의 경우 먼저 파견하고 나중에 자문을 보냈지만, 아직 우리(청국)의 회답을 보내 이를 윤허해주지 않았으므로 과거 사례로서 인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위안스카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청국 광서제의 유지(諭旨)가 조선 고종에게 전달된다. "조선이 서양 국가에 사절을 파견하려면 반드시 먼저 지시를 청하여야 하며, 윤허를 받기를 기다려 다시 가도록 해야 바야흐로 속방체제에 부합한다"며 이에 대한 조치로 이미 파견했던 주일공사 민영준을 귀환시킨다. 결국 같이 부임했던 참찬관 김가진을 대리공사로 삼게 된다.
그런데 박정양 주미공사 이하 관원들은 8월 7일(양력 9월 22일) 고종에게 미국 부임 인사를 한 다음날인 8일(양력 9월 23일) 서울을 출발, 제물포로 가기 위해 남문 밖에서 모여 함께 출발하기로 한다. 주미공사 일행이 도미 길에 오르려 하자 리홍장은 위안스카이에게 '공사파견은 허락을 기다리라'는 광서제 유지를 담은 전문(箋文)을 보내 고종을 위협·압박해 결국 주미공사관 일행은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종은 8월 11일(양력 9월 27일) 윤규섭을 재주관(齎奏官)에 임명해 북경으로 파견해 전권공사 파견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결국 '영약삼단'(별도의 약속과 세가지 단서) 준수를 조건으로 전권공사 박정양은 조선을 떠나 일본과 중국 상하이 하와이를 거쳐 부임길에 오른다.
■ 참고자료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김원모 완역,『구한말 격동기 비사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 출판부(2017)
김원모,『상투쟁이 견미사절 한글국서 제정 下』단국대학교출판부(2019)
박정양 저, 한철호 역,『미행일기』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5)
이동국,「조선의 구미전권공사 파견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1887~1890)」『학림』47(2021)
이상재 저 · 한철호 역,『미국공사왕복수록』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9)
정경민,「조선의 초대 주미조선공사 파견과 친청노선 강화」『역사와현실』96(2015)
한종수,「주미 조선공사관 개설과 '자주외교' 상징물 연구-공문서 및 사진자료 분석을 중심으로」『역사민속학』44(2014)
한철호,「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의 활동과 그 의의」『한국사학보』(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