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⑨ 첫번째 주미조선공사관 개설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서 공사직 수행

2023-09-08 14:53:49 게재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

미국에 최초로 파견한 외교사절단은 전권대신 민영익과 부대신 홍영식 등 보빙사(報聘使) 10명이었다. 보빙사를 통해 미국의 선진문물을 견문한 후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상주 공사관을 개설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고종은 초대 전권공사로 박정양을 임명하지만 청나라 이홍장으로부터 '영약삼단'을 준수하라는 요구를 받는 등 우여곡절 겪었다.

1887년 11월 12일 서울을 출발한 초대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은 제물포와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에서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 무변(武弁) 이종하, 알렌만과 함께 홍콩에 거주하는 민영익을 만나러 간다.

당시 민영익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견제하고자 한 한러밀약설을 위안스카이에게 제보했고, 반대로 청나라의 고종폐립음모를 조선에 밀보하는 등 이중배신행위로 홍콩에서 정치적 망명한 처지였다.

이들이 민영익을 찾은 이유는 미국에서 경험한 다양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보빙사 부정사 홍영식은 갑신정변으로 멸문지화를 당한 상황이었고,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 등은 미국 망명 중이었다.

최초의 주미조선공사관 주소(이상재, '미국공사왕복수록')


이들은 민영익으로부터 미국에 대한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정보 외에도 주미조선공사관 개설 및 유지비용 등을 자문받는다. 주목되는 항목으로는 국왕 고종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과 동궁(東宮)의 예진(睿眞, 왕세자의 초상화), 태극기, 호피 등이 눈에 띈다.

미국에 조선공사관 개설 후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왕과 왕세자의 탄신일 등 특별한 날에 어진과 예진을 모셔놓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 직접 왕을 배알하고 경의할 수 없을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절하는 예식)를 행한 기록들이 박정양의 '미행일기', 9대 공사 이범진의 '미사일록' 등에 보인다.

연 임대료 780달러 건물 임대해 입주

박정양 일행은 다시 요코하마로 돌아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거쳐 1888년 1월 9일 워싱턴DC에 도착한다. 이후 13일 국무장관 베이야드(T. F. Bayard)를 만나 국서봉정 일정과 내용을 협의하고, 17일 미국 22대 클리블랜드(Stephen G. Cleveland) 대통령을 예방하고 국서를 봉정한다.

초대공사 박정양 일행은 당시 조선의 경제적 여건상 일단 상주공관을 임대해 임시로 사용한다. 훗날 박정양 공사가 일본을 거쳐 귀국 후 1889년 7월 고종에게 복명(復命)하는 자리에서 나눈 기록을 보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상(고종)이 이르기를 "경비가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관사(館舍, 주미조선공사관)를 개설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마련하였는가?" 하니,
박정양이 아뢰기를 "관사를 개설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비록 화려하게 할 것은 없다 해도 전적으로 검소하게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물가가 높아 우리나라에 비교해서 몇 배나 되기 때문에 비용을 많이 들여도 물품들이 오히려 열악(劣惡)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모든 물품을 화려하게 하거나 검소하게 하는 것은 본래 정해진 한계가 없으니, 풍성하게 해야 할 때에는 풍성하게 하고 절약해야 할 때에는 절약하는 것이다"하니,
박정양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1월 9일 워싱턴DC 도착 후부터 참찬관 알렌의 주선으로 최초의 주미조선공사관을 알아보는데, 1월 11일 O가(街) 1513번지(1513 O Street) 피서옥(皮瑞屋, Fisher's house)을 참찬관 이완용과 서기관 이하영, 이상재를 보내 살펴보게 한다.

집은 1887년 4월 자색 벽돌로 새로 건축한 남향의 3층 집으로, 1층에는 거실과 식당 주방 식료품실이 있고, 2층에는 침실 5개, 무도장과 욕실이 있으며, 3층에는 대형 사무실과 저장실이 있어 공간은 넉넉했다. 1월 12일 집주인 토마스 피셔와 계약을 체결하는데, 증인 겸 보증인으로 참찬관 알렌을 세우고 대조선공사 박정양이 서명한다.

공사관 허드렛일을 하는 흑인 인부 두 사람을 각각 월 30달러씩 봉급을 주기로 하고 고용하고, 공관 임대료는 통합 780달러를 춘·하·추·동 3개월씩 사계절로 분할해 3개월 임대료 195달러를 사계절의 첫달(1월, 4월, 7월, 10월)에 납부한다. 내부 가구는 미국 현지에서 1250달러를 들여 구입해 사용했다.

이 공관에는 초대공사 박정양을 비롯한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상재, 서기관 이하영, 번역관 이채연과 이들을 수행하며 도와주었던 강진희 김노미 이헌용 이종하 허용업 등 10명과 고용한 흑인 2명을 합해 총 12명이 생활했다. 피서옥은 비록 길고 좁은 평면이지만 공간 구성이 매우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공적인 업무와 일상적인 생활공간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다른 외국의 공관원 및 미국 행정·사법·입법부를 대표하는 관료들을 초대해 연회 및 모임을 개최하기에는 다소 협소한 감이 있었다. 이에 주변 공관을 대여해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후에 그 공관을 매입해 1889년 2월부터 2차 주미조선공사관으로 사용한다.

공식적으로 공사관을 개설 운영하면서 박정양은 홍콩에서 민영익으로부터 받아온 어진과 예진 각 1본(本)을 공사관에 봉안해 매월 1일과 15일, 특별한 의미있는 날에 조선 경복궁을 향해 망궐례를 행했다. 조선의 공사관원들은 이곳에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사람들을 만나고 만찬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외교활동을 수행한다.

공사 구분된 최초의 서양식 외교공관

한편 주미조선공사관의 원도면을 보면 당시 박정양 이완용 이상재 이하영 이채연 등 주요 공사관원들의 외교활동 및 일상생활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정부가 파견한 공사관원들은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에서 외국 외교관들을 만나고, 주방에서 요리된 음식을 하인들에게 전달 받아 식당에서 식사하고, 잠을 자기 위해 계단을 통해 2층과 3층의 침실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다. 각 공간이 독립적으로 분리돼 일상생활과 공적인 업무를 병행할 수 있는 최초의 서양식 외교공관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관에서 박정양 공사를 모시고 활동한 서기관 이상재는 1926년 당시 후일담을 남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인들 가운데 시골 사람은 공사(公使) 일행을 여자처럼 대접하기도 했는데, 미국 여자들이 실내에서도 모자를 쓰는 것처럼 공사 일행도 갓을 쓰고, 공사 일행의 의복도 울긋불긋한 비단옷으로 여자의 옷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 일행 중에는 수염 많은 사람이 없었는데, 있다 해도 미국 여자의 수염만도 못했기 때문에 미국인들로서는 여자로 착각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적고 있다.

당시 청나라 공사는 조선을 속방(屬邦)으로 생각해 박정양이 미국 국무성과 단독으로 접촉해 외교문제를 협의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또 조선에서 파견된 통역관이 외아문(外衙門)에서 불과 1년 정도 영어를 공부한 사람이라서 실제로 미국 관리와의 회담은 미국의 반벙어리와 조선의 반벙어리가 이야기하는 우스운 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참고자료
『승정원일기』(고종 26년 7월 24일 무진)
문화재청,『주미대한제국공사관 복원보고서』(2019)
박정양 저, 한철호 역,『미행일기』,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5)
이상재,「상투에 갓 쓰고 미국(米國)에 공사(公使)갓든 이약이, 벙어리 외교(外交), 그레도 평판(評判)은 조왓다」, 『별건곤』 창간호(1926)
이상재 저, 한철호 역,『미국공사왕복수록』,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9)
한종수,「주미 조선공사관 개설과 '자주외교' 상징물 연구-공문서 및 사진자료 분석을 중심으로」,『역사민속학』4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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