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스스로 힘으로 서기 위해 노력하는 아세안경제 주목

2023-10-27 11:53:20 게재

지역통합 성과 기반으로 반도체 산업에서 활로 … 경제교류 다변화 흐름에 한국도 함께 가야

이선진 전 인도네시아 대사

아세안에 빠져 지낸 17년 가운데 2016년 7월 베트남 학자와 나눈 대화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당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두고 중국의 주장을 거부하고 아세안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미국은 아세안과 함께 PCA 판결을 준수하라는 성명을 발표하려 했다. 그러나 필리핀, 베트남을 포함 어느 나라도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며칠 후 필자가 베트남 학자에게 '왜 미국에 동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힘이 없이 외부세력의 도움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사태 악화만 초래할 뿐"이라고 답했다.

아세안은 1990년부터 오늘날까지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해왔다. 1990년대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세계화 조류가 퍼지자 아세안은 공동 목표를 종래 정치·안보에서 경제로 전환했다. 지금까지 경제성장, 즉 자기 힘을 키우는 전략은 어느 경우에도 핵심전략의 하나이다. 예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2000년대 중국이 세계 제2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였을 때, 그리고 현재 미·중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아세안은 자신의 능력배양을 최우선시했다. 지역통합을 통해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추구했고, 동아시아 지역생산 협력체제에 가담해 수출 경쟁력을 키우고 투자 환경을 개선했다. 그 과정에서 제조업 기술, 투자 환경 개선, 그리고 지역 네트워크를 발전시켜 외국투자(FDI) 유치에 성과를 냈다.

이러한 전략과 노력의 결과, 아세안 경제는 다음 표와 같이 성장했다. 이어 아세안 경제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게 하는 세 가지 분야를 소개한다.

1. 반도체 산업에서 활로를 찾는 아세안

동남아시아 10개국 정상 및 각료급 인사들이 지난 달 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코로나 사태 이전, 아세안 경제는 연평균 4.5~5%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고 2015년에 아세안 공동체(ASEAN Community)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미·중 무역/기술 전쟁과 Covid 19 직격탄을 맞아 2020년 성장률이 -3.2%로 급락했다. 미·중 무역/기술 전쟁은 수출주도의 경제구조를 가진 아세안에 위기로 다가왔고, 지역 통합과 경제성장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아세안 경제는 2021년 전환기를 맞이했다. 반도체 및 전자산업 분야의 외국 투자(FDI)가 크게 증가했다. 이에 아세안 나라들은 반도체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보고, 투자를 더욱 많이 유치하기 위하여 인재 양성, 세제 혜택, 투자 환경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

대규모 반도체 투자 유입

아래 표는 2021~2년 두 해 동안 세계에서 반도체 투자를 100억 달러 이상 유치한 나라의 리스트이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포함해 6개국에 불과하다. (OEC 2023.5.3 The world's top semiconductor investors).

흥미로운 사실은, 오래전부터 2020년까지 반도체 외국투자를 가장 많이 받아들인 나라는 압도적으로 중국이었으나, 이 추세는 2021년 역전이 일어났다.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선언하고 중국에 대한 견제 정책을 시작하자, 중국에 투자했던 미국, 유럽, 동아시아 기업들이 중국 사업 규모를 줄이거나 이탈해 유럽, 동남아로 이동했다. 아세안은 그 파급효과를 본 셈이다.

왜 아세안인가


중국 사업을 줄인 다국적 기업들은 중국 대체지역을 찾았다. 아세안은 중국 대체지역으로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첫째, 아세안의 전기·전자(E&E) 제조업은 오랫동안 발전해 왔다. 1980년대부터 일본기업이 동남아 지역에 전기·전자 제품 생산공장을 짓고, 미국 유럽 일본 시장에 팔았다. 또한, 아세안은 동아시아 지역생산 협력체제 속에서 제조업 기술, 인력 양성, 투자 환경 개선 그리고 지역연계 (regional network)을 발전시켜 왔다.

둘째, 동남아에는 반도체 칩을 필요로 하는 전방(前方)산업이 발달해 있다. 휴대전화기, 가전(家電)제품, 자동차, 컴퓨터 생산공장이 동남아에 많이 포진되어 있다. 아세안은 또한 통신, 의료, 농업, robotics, 산업 자동화, 물류 산업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digital economy 4.0).

한편, 세계 자동차 제조회사들이 동남아 지역에서 전기자동차(EV) 생산공장을 건설하거나, 배터리와 부품 생산 설비에 투자하고 있다. EV 배터리(lithium ion battery)의 주 원자재는 니켈이다. 인도네시아가 세계 최대 니켈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2. 아세안 지역통합의 성과

1990년대 10개 회원국으로 풀하우스가 된 이후, 아세안은 지역통합에 온 힘을 쏟았다. 회원국 사이 인적·물적·자본 교류를 막는 폐쇄적 장벽들을 과감하게 부수었다. 지역통합이 경제성장과 해외투자의 유입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지역통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유효한 성장 전략이었고 10개 회원국의 결속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아세안 지역통합과 인프라건설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아세안 경제의 미래에 대한 낙관을 가능하게 한다.

(1) 관세율

회원국 사이 교역에서 평균 관세율은 0.2%이지만, 주요국은 거의 무관세(0.03%)를 적용한다.

(2) 통신망

모든 회원국이 광대역 통신망 건설에 참여하여 2016년 즈음에 모든 나라에 WIFI 망이 보급되었다. 현재 무료 인터넷, 무료 통화(국내, 국제)가 가능하다. 회원국들은 4세대(4G) 통신망을 5세대로 업그레이드 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3) 수송망

미얀마를 제외하고 아세안(대륙) 어디를 가든, 나아가 중국까지 버스노선이 연결되어 있다. 화물 트럭, 자가용의 국경 통과도 허용한다. 이는 국제 수준의 도로망이 아세안 전역에 완성되었음을 의미하고, 차량의 국경 통과를 허용하는 정부 협정(CTA)도 2015년 발효되었다.

다만, 화물 운송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화물 트럭의 국경 통과는 아직 이웃 나라 사이 양자(兩者) 차원에서만 실행된다. 중국 등 제3국의 화물 차량이 자국 영내를 통과 운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4) 고속철도

쿤밍(중국)-비엔티안(라오스) 연결 철도가 2021년 12월 개통됐고 말레이시아와 태국 철도 건설공사도 재개됐다. 쿤밍-싱가포르 고속철도가 운행되면 이제까지 트럭 위주의 화물·승객 운송에 수송 혁명이 일어나고 3자, 다자 화물 수송도 가능할 것이다.

(5) 비자 면제

회원국 상호 간에는 단기간 체류의 경우 비자를 면제해준다. 또한, 국경 통과 중(border pass) 제도가 있어서 여권이나 비자 없이 하루 동안 이웃 나라 국경도시의 방문을 허용하는 제도이다. 국경도시 간에 출퇴근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6) 전력(電力) 수출입

이웃 나라 사이, 즉 양자 차원에서 전력 수출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022년 6월 다자 차원의 전력 수출입이 처음으로 성사됐다. 라오스가 생산한 전기를 태국, 말레이시아 전력망을 이용해 싱가포르에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다자 방식의 전력 수출입이 늘어날 전망이다.

(7) 메콩강 유역 개발

1992년 아시아개발은행은 메콩강 유역 개발 사업(GMS)을 착수했다. 사통팔달의 도로망을 건설하고 도로망에 따라 경제회랑을 조성했다. 그 결과, 1992년 메콩강 유역의 연간 무역액은 50억달러였으나 2020년 6390억달러로 늘어났다.

3. 아세안 경제교류의 다변화

미국은 아세안의 최대 투자국이고 중국은 최대 무역대상이다. 미·중 경쟁 속에서도 2020년 아세안 무역과 투자 유입 관련 특기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의 투자가 중국, EU, 일본 등 다른 역외 국가를 압도하고 있다. 아세안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나라는 미국(25.5%), 아세안 역내(16.6%), EU(7.2%), 일본, 중국 순이다.

둘째, 아세안 최대 무역 상대는 아세안 역내(21.2%), 중국(19.4%), 미국(11.8%) 순이다. 중국의 비중이 차츰 줄어들고 있다.

셋째, 아세안의 최대 경제파트너는 미국, 중국이지만 EU, 일본, 한국 등의 비중도 큰 만큼 경제교류 다변화에 성공했다. 또한, 아세안 역내(intra-ASEAN) 무역, 투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세안 경제는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에의 함의

1만7000개의 한국 기업들이 아세안의 성장세를 내다보고 진출하고 있다. 여기엔 전자 산업, 전기 자동차 생산, 포스코 제철소까지 첨단 기술 산업과 대규모 사업도 포함돼 있다. 이처럼 우리 기업들은 아세안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의 전략적 사고와 정책적 지원이 부족하다. 아세안을 우리 외교의 종속 변수가 아닌, 독립 변수로 보고 대담한 전략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개별경제와 아세안(통합) 경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반도체 기업이 말레이시아에 투자할 때 그 나라 반도체 수요만 보지 않고 아세안 지역 전체(region-wide)의 수요를 조사하고, 인적 물적 자본의 자유화(원활화), 관세율 특혜 등도 염두에 두고 투자한다. 개별경제와 아세안(통합) 경제를 함께 보아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선진 전 인도네시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