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원조’ 동남아와 더 가까워지려면

2024-04-05 13:00:33 게재

2000년 동남아 역사는 동서 세계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 …지배받던 기억 딛고 성장·발전하겠다는 의지 강해

호주 전통공연 보는 아세안 퍼스트레이디들 3월 6일 호주-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별 정상회의 참석차 호주를 방문 중인 아세안 회원국 퍼스트레이디들이 멜버른 박물관에서 호주 원주민 전통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호주-아세안 특별 정상회의는 올해 50회를 맞았다. 멜버른 AFP=연합뉴스

개별 동남아 10개국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지역기구,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가장 잘 표현한 문구를 꼽으라면 ‘다양성 속 통일성’이다. 세계는 이 지역을 아세안으로 통칭하지만, 각 국가와 그 지역 안에는 수많은 특징들이 있다는 이야기다. 가만 놓고 보면 동남아 10개국에서 공통점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인구 규모, 국가 면적에서 모두 큰 차이가 나고, 언어와 민족, 인종, 종교, 정치 체제 등 비경제적 측면에서도 다르다.

단적인 예로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을 놓고 보면 싱가포르와 미얀마의 차이는 60배다.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성원들의 문화나 가치관 등 비정량적 요소에선 그 특성이 더 많다. 그렇게 다른 나라끼리 뭉쳐 큰 세를 형성하고 있는 아세안을 본 사람들은 ‘다양성 속 통일성’이라는 표현에 감탄한다. 우리가 이러한 특성을 잘 알고 대아세안 정책을 다층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동남아, 세계화의 원조

동남아는 왜 다양성의 지역인가. 태평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이고, 그 영향으로 다양한 문화와 교류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2000년 동남아 역사를 보면 동남아는 동서 세계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배타적이지 않고 늘 ‘열린 지역’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인도, 중국, 이슬람, 기독교 4대 문명이 차례로 동남아에 들어왔다. 또 그와 함께 다양한 사람과 문화도 유입돼 동남아는 인종, 종교 및 문화의 용광로가 되었다. 동남아인들의 세계관이 포용적이고 개방적이며 융화적인 특성을 띠는 이유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나 자연환경, 문화적 개방성 때문에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을 필두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소규모의 군대로 이들 지역을 식민 지배했다.

당시 이들은 대서양-희망봉(수에즈 운하 개통후엔 홍해)-인도양-동남아로 이어지는 ‘동방항로’를 이용했다. 또 스페인은 대서양-카리브해-멕시코 육로-멕시코 아카폴코-태평양 필리핀 마닐라간 갈레온 무역로(또는 대서양-카리브해-남미 마젤란 해협-태평양)-동남아로 이어지는 ‘서방항로’로 이 지역에 진입했다. 서방항로의 스페인은 멕시코의 라틴 문화를 필리핀 원주민에 전파면서 인종과 문화의 다양화, 동남아의 모자이크식 다양성에 기여했다.

필자는 서방 열강이 동방·서방 양 항로를 통해 동남아에서 다시 만난 것을 보면서 대륙이 분리되기 전의 세계, 판게아를 떠올린다. 세계화의 원조는 동남아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동남아가 외부 세계와 호흡한 것은 과거 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대 동남아는 ‘외향형 국가’였다. 푸난, 참파(임읍, 점성), 스리위자야, 사렌도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점과 선’을 통한 교역을 중시했다. 모두 바다를 끼고 있었고, 교역을 통해 번성했다. 여기서 ‘점’은 항시(港市), 즉 항구 도시를 의미하고 ‘선’은 항시들을 연결한 교역로를 뜻한다.

서정인 고려대아세안센터 연구위원 전 주아세안 대사

세계와 호흡했던 동남아

그러나 9~10 세기의 중세에 이르러 동남아는 변혁기로 접어든다. 인접한 당나라가 쇠퇴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쯤 동남아 지배 세력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버마 내륙부 등 인구가 조밀한 농업지대를 기반으로 한 ‘내향형 국가’를 이뤘다. 대륙 동남아 국가들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다 15~17세기로 넘어오면서 교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점과 선을 중시한, 외향형 국가가 융성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을 상대로 향신료 교역을 한 말라카 왕국이 대표적이다.

경제 침체로 유럽의 동남아 향신료 수요가 줄고, 이윤이 크게 줄자 네덜란드는 기존 교역로의 점과 선 지배 방식에서 탈피해 내륙을 지배하는 ‘면’의 식민지 지배로 전환한다. 즉 땅을 활용한 방식이다. 커피, 설탕, 사탕수수 등 당장 돈이 되는 환금작물 재배를 위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중국인을, 영국은 자국 식민지령인 말레이시아와 미얀마에 인도인 등 외부 노동자들을 끌어들인다.

과거 동남아의 역사 패턴을 보면, 고대 왕국의 명멸에는 외부 세력이 영향을 많이 끼쳤다. 향신료를 비롯해 풍부한 천연자원이 서방의 훌륭한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적으로 붙어있는 중국 대륙의 정치적 상황에 큰 영향을 받았다.

중국 안정기와 서방의 진출기에는 바다를 낀 외향형 국가가 발전했고, 반면 중국이 혼란하거나 서방의 진출이 소강하면 내향형 국가가 번성했다.

21세기 외교무대 주역

지금의 동남아, 아세안은 어떤가. 시진핑의 중국도, 미국 등 서방도 동남아에 러브콜을 보내지 않는 나라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외향성을 더욱 요구받는 시대를 맞은 아세안이다. 아세안은 2021년 영국에게도 아세안 대화상대국 자격을 부여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 인도, EU 등에 이은 11번째 아세안의 친구다.

이 뒤에서 숱한 나라들이 아세안과 손을 잡기 위해 줄을 서 있지만, 아세안은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중이다.

아세안이 외교 관계를 다양한 국가들과 구축하면서도 선택적으로 관계를 맺는 배경에는 과거 역사에서 익히 체득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화로 대표되는 시대 흐름에서 ‘외향형 국가’가 되어야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과거 역사에선 그 시기에 지배를 받았던 만큼, 이번 세기에 맞은 ‘기회’에서는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성장, 발전하겠다는 일종의 생존 본능으로도 읽힌다. 이는 올해로 창설 57년을 맞은 아세안의 반세기 역사를 보면 가히 이해된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때 하나로 뭉침으로써 공산 베트남의 위협을 잠재운 아세안은 탈냉전 후에는 베트남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친구로 만들었다.

또 탈냉전 후 중국이 급부상해 동남아의 도전으로 떠오르자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창설해 집단 대응해오고 있다. 그러나 날로 심화하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과거 식민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 여기에 대응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등으로 아세안은 또 다른 도전을 받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아세안은 어느 일방의 편을 들기보다는 헷징, 균형, 편승전략을 적절히 섞어 구사한다. 미국을 중국 견제용으로 계속 역내에 묶어두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인도, 일본, 한국 그리고 호주 등 제3국을 헷징 협력국으로 보고 전략적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영국을 끌어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더해 아세안은 미중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인도, 브라질 등과 함께 제3 축으로 ‘글로벌 사우스’로서 중도적 실용주의의 길도 모색하고 있다. 10개 국가가 각각의 목소리를 내다가도 단일 목소리를 내는 등 아세안의 외교가 일관적이지 않고 모호하기까지 해 헷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호함 속 메시지 읽어내야

중국 부상에 대한 아세안의 대응은 최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보듯이 아직 성공했다고 볼 순 없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이 기회인 동시에 리스크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안보ㆍ경제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느리지만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만큼 좀 더 지켜볼 필요는 있겠다.

아세안이 특정 사안에 목소리를 낼 때도 각 회원국의 입장을 고려해 10개국 중 역량이나 준비가 제일 안 된 회원국에 맞춘 ‘최소 공배수적 협력’의 결과물로 대응하고 있다. 혹자는 이런 아세안의 모습을 근거로 외부인은 아세안이 약하고, 느리다는 평가하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할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느리게 가되 결국 이기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있다.

한국-아세안 관계는 우리가 1989년 아세안 대화상대국이 된 이후 지난 35년간 교역, 투자, 인적 교류 분야에서 긴밀히 발전해 왔다. 그러나 아세안을 두고 경쟁하는 대화상대국이 늘고 있고, 미중 디커플링(탈동조화), 세계화와 공급망 재편, 디지털 대전환 등 분기점의 국제 환경하에서 더욱 치밀한 외교가 요구된다. 특히 미중 전략 경쟁이 구조화 및 장기화 될 전망이 점쳐지고, 시진핑의 중국 리스크 못지 않게 금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트럼프 리턴 매치 뒤 나올 수도 있는 소위 ‘트럼프 리스크’를 생각할 때 더욱 더 그렇다.

한국-아세안 관계에서 요구되는 우리의 자세는 아세안 중심의 동심원적 협의체(도표)를 잘 활용하는 아세안에 대한 다층적 접근이다.

10개 개별 국가 특성에 따른 맞춤형 양자 외교(생태계 비유시 나무, 미시 전략)와 아세안을 하나로 보는 통일성 차원에서 아세안 외교(숲, 거시 전략) 외에도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태국 등 ‘메콩 국가’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등 ‘해양 국가’ 등 소지역 외교(군락, 미시와 거시의 중간 전략)가 아세안과의 관계를 탄탄히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외향형 국가’를 바라면서도 어느 세력에 다시 종속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아세안의 입장을 이해하고, 거기서 비롯된 복잡다단한 메시지를 읽어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서정인 고려대아세안센터 연구위원 전 주아세안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