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범유전체 정보 해독과 희귀병 대응

2024-04-09 13:00:01 게재

희귀질환은 떼어놓고 보면 희귀하지만 합쳐서 보면 흔하다는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개별 희귀질환은 분명 앓는 환자가 적은 질환을 가리킨다. 국내에서는 그 기준을 보통 2만명 이하로 잡는다. 그러나 이러한 희귀질환은 종류가 워낙 많아 희귀질환을 통째로 합쳐놓고 보면 전세계에서 3억명 이상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흔하다.

국내에서는 2023년 기준 1248개 희귀질환이 지정돼 있고 발생자수는 2021년 기준 약 5만5000여명에 이른다. 미국에서는 7000여개 희귀질환이 지정돼있으며 이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수는 3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제2형 당뇨병을 앓는 환자와 비슷한 숫자로 저마다 서로 다르긴 하지만 희귀질환으로 인해 고통 받는 환자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높은 다양성과 차이점을 보이긴 하지만 희귀질환의 80% 가량은 유전적인 특징 때문에 발생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바꿔 말하면, 희귀질환의 상당수는 DNA가 바뀌어 유전자가 제 기능을 못할 때 발생한다. 그러니 DNA 비교를 통해 어떤 유전자에 어떤 변화가 생겨 희귀질환이 발생하는 것인지 규명하는 것은 그 원인을 밝히는 중요한 일이 된다.

원인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이를 활용해 환자의 희귀질환을 보다 정확하게 진단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바뀐 DNA, 환자와 환자가 아닌 사람이 지닌 DNA 수준의 차이를 변이라고 부르곤 한다. DNA 수준의 비교를 통해 원인 유전자와 원인 변이를 발굴하는 것은 희귀질환 연구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고도화된 염기서열 해독 기법 활용

염기서열 해독기법은 이러한 DNA 수준의 비교를 가능케 하는 핵심기술이다. 이는 DNA에 담겨있는 분자 정보를 해독해 A, T, G, C와 같은 문자정보로 변환시켜주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사람과 컴퓨터가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의 문자정보가 생산되면 희귀질환을 앓는 사람과 앓지 않는 사람의 DNA를 직접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희귀질환을 일으키는 유전변이라면 환자에게서는 자주 나타날 테지만 환자가 아닌 경우에 그 변이는 드물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의 DNA를 비교함으로써 어떤 유전자에 생긴 어떤 변이가 특정한 희귀질환을 일으키는지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염기서열 해독기법을 활용해 다양한 희귀질환에 대한 변이가 새롭게 규명돼 많은 희귀질환이 정확하게 진단될 수 있게 됐다. 아쉽게도 기존 염기서열 해독기법은 기술적인 한계를 지녀 실재하는 변이 중 일부만을 검출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절대다수는 진단이 어렵다는 한계가 남아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최근 염기서열 해독기법이 고도화되며 차츰 해결되고 있다. 진단 가능한 희귀질환과 환자의 수는 점차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되는 이유다.

롱리드 시퀀싱(long-read sequencing) 기법이라 불리는 이 고도화된 염기서열 해독기법은 기존 기법으로는 검출할 수 없었던 온갖 복잡한 형태의 변이까지도 검출해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예컨대 환자의 DNA에 특정한 원인변이가 분명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너무 복잡하고 크다면 기존 기법으로는 검출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복잡하고 큰 변이는 이를 정확하게 검출할 수 있는 롱리드 시퀀싱 기법을 접목시켜야만 그 정체를 명확하게 검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전세계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롱리드 시퀀싱 기법을 활용해 환자가 아닌 이들의 DNA 정보를 전례없는 고품질로 확보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이 고품질 DNA 정보는 인간 범유전체라 부르는데 이는 환자가 아닌 사람에게 존재하는 다양한 변이정보를 제공해준다. 이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변이를 찾아내기 위한 중요한 배경 정보로 쓰일 수 있다.

범유전체 초안 공개에 한국인 제외돼

다만 현재까지 다양한 인구 특징을 반영할 수 있는 47명의 DNA 정보가 범유전체 초안으로 공개됐지만 그중 한국인은 단 한명도 포함되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한국인 범유전체가 있어야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한국인 환자의 변이를 비교하기 쉽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로서는 그러한 기반정보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기술이 이제 막 성숙했기에 활용할 여지는 너무나 많다.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인 범유전체가 구축되고 희귀질환 환자에 대한 정보도 고품질로 구축되길 바란다. 이를 통해 수많은 희귀질환을 엄밀하게 진단하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길을 한국에서 앞장서 닦아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 준 충남대 교수 생명시스템과학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