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유라시아 물류, 제3자 활용이 답이다
2025년 12월 통일부는 연두업무보고에서 ‘서울-북경 고속철’ 구상을 제시했다. 최근 들어 논의가 있었던 사안도 아니고 구체적 계획도 제시되지 않아 다소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렸다. 희망에 부풀어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것이 벌써 30여 년 전 일이다. 이후 유라시아로의 다양한 연결을 도모하면서 한반도 현실의 변화를 꿈꾸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까마득한 과거로 느껴진다.
한반도의 유라시아 물류 연결은 그 자체가 한반도 지정학을 변화시키면서 발전을 도모하는 전략이다. 남북관계 발전을 전제로 하면서 이를 지원하는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에 통일부로서는 매력적인 의제다. 19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고 국가적 과제로 추진되어 주목을 받았다.
한국은 사실상 섬나라이다. 1991년 소련 붕괴는 이러한 지정학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떠올랐다. 북한의 개방과 남북관계 발전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북핵 문제와 대북한 제재가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만 또는 다소 감상적으로 접근함에 따라 실질적 진전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다가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러시아 중국 활용 어렵지만 북한 더 어려워
1민족 2국가가 되어버린 남북한은 협력보다는 경쟁이 우선한다. 그리고 국가 간 거래의 관행도 적용되지 않는다. 합리적 소통도 어렵고 힘들게 성취한 합의도 파기 위험이 상존하며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 극복은 운명적이다.
당사자 간 대화와 거래 그리고 이행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유능한 제3자를 이용해 보면 어떨까. 러시아와 철도 연결, 중국과 수도 간 고속철 건설 등 유라시아 물류 연결 사업에 있어 당사자는 남북한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다. 러시아와 중국의 독특한 협상 스타일에 대처하고 지정학적 현실을 극복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남북한 간 소통과 합의와 이행은 더 어려운 과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난관을 헤쳐나가는 데 있어 적임자로 보이는 제3자를 20년 전 프랑스에서 발견했다.
프랑스 파리에는 국제철도연맹 본부가 자리해 국제철도협력을 위한 다양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의 코레일 사장도 러시아 국영철도회사 사장도 국제 논의 참석을 위해 파리를 방문한다. 그 기회에 TSR-TKR 연결사업 진전을 위한 협의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 국영철도회사(SNCF)의 유럽을 무대로 하는 국제적 철도운영 경험과 노하우를 접하는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에는 또한 한국의 고속철 건설에 기술전수를 했던 기업 알스톰이 있다. 알스톰은 중국의 초창기 고속철 건설에도 관여했다. 한국과 중국의 고속철 기술 출발점이 동일하다. 그래서 파리는 한반도와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과 운영에 대한 담대한 사업 구상을 논의하고 여건을 조성하는 시도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북한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북한의 파리 주재 유네스코(UNESCO) 대표부를 허용하면서 북한을 대표하는 역할도 수행하도록 했다. 북한 고위층을 상대로 한 의료진 파견도 수시로 이루어졌다. 1983년에는 미테랑 전 사회당 대표가 평양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통령 재임 중에도 북한 방문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한 프랑스는 냉전시대에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교류했다. 미국과 다른 독자노선을 추구하면서 드골 대통령 시절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탈퇴하기도 했다.
2008년 유럽연합(EU)의 대외정책을 주도하던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동분서주했다. 러시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조지아 전쟁의 휴전을 중재했다. 당시 한국은 1993년 프랑스 대통령의 최초 방한 이래 두 번째 방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르코지 대통령의 양자 방한은 실현되지 않았다. 활동적인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남북한 동시방문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어떠했을까. 새로운 방향으로 북한 핵문제 중재를 시도하고, 한반도를 유라시아와 잇는 수송로 연결 및 확대 사업에 프랑스가 기여하는 역할이 부여되었다면 사르코지 대통령은 평양을 거쳐 서울을 방문했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20년 전 프랑스 사례를 소환하는 이유
프랑스 기업은 한반도 밖으로의 수송로 연결사업 참여에 관심이 있었다. 프랑스정부도 오랜 세계 경영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외교력을 과시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그 무렵 한국정부는 프랑스와 방산협력을 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2007년 레바논에 동명부대를 파견했다. 여건은 조성되어 있었으나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열정과 시도는 없었다.
이후 세상은 많이 변했다. 프랑스도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 상황을 복기하면서 참고할 가치가 있다. 여타 관심 사안에 대해서도 시사점이 있다. 이제는 유라시아 물류에 바닷길이 추가되어 러시아 연안을 따라가는 북극항로 논의가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