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전달체계 개선방안 찾기

“대형병원·동네의원 무한경쟁 끝내고 역할 분담해야”

2024-04-09 13:00:01 게재

광역시도는 국립대병원 중심, 시군구 ‘주치의’ 기반 의료체계가 최선 … “환자중심 개혁”

전공의들이 두 달 가까이 집단이탈하면서 우리나라 ‘의료전달(이용)체계’의 민낯이 드러났다. 규모가 큰 수련병원들의 진료역량이 휘청댔다. 전공의의 값싼 노동에 의존한 결과 전공의를 대신한 기존 인력으로는 부득이하게 중증도가 낮은 환자들을 연기·전원하는 등 상황이 됐다. 개별 수련병원 입장에서 보면 경영상 어려움이 발생했지만 전국적 차원에서 굳이 대형병원으로 안가도 될 만한 경증환자들이 쏠려 이용한다는 게 확인됐다.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이용 쏠림 현상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십여년 전부터 1차(의원)-2차(병원)-3차병원(종합병원) 간 기능을 새로 정립하고 합리적으로 의료기관을 이용하자는 논의와 제안이 쏟아졌다. 대형병원 환자쏠림은 비수도권 지역의료기관의 축소와 의료인력 부족, 의료취약지 발생 등 부정적인 영향을 연쇄적으로 일으킨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의료전달체계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는 필수의료를 전국 어디서든 받을 수 있도록 필수의료 전달체계를 정상화하겠다며 의료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의대증원 문제로 갈등을 빚는 의사단체를 제외하고는 각계에서 정부가 전례없는 추진의지를 보인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의료기관 이용이 쉽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바라는 국민 환자 입장에서 보면 환자중심으로 의료이용체계를 개선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관련해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었다

대형병원으로 환자 쏠림 해소와 지역의료자원 활성화, 그리고 전국 의료자원의 효율적 이용으로 의료의 질을 높이자는 요구가 날로 확산되고 있다. 이를 위해 대형병원과 동네의원이 경증환자를 두고 경쟁하는 상황을 끝내고 협력으로 이익을 나누도록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뒤따른다.

9일 조승연 인천의료원장(지방의료원연합회장)은 “국민들이 의료필요도에 따라 의료기관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며 “우선 대형병원의 백화점식 경영행태를 개선해야 한다. 중증-난이도가 높은 환자들 위주로 봐야 한다. 지역에응급-중증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인력과 장비를 갖춘 지역거점의료기관을 확충해야 하며 만성질환과 건강관리를 하는 주치의기관을 설치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환자들은 사는 곳에서 진료를 받고 싶어한다. 서울 빅5병원같은 국립대병원들이 역량을 키운다면 굳이 서울로 쏠리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의료개혁 추진과 논의를 기대한다. 필수의료 확충에 대해 건강보험심의위원회 내부의 지지가 매우 높다. 뜻을 모아보자”고 말했다.

‘응급환자 놓치지 않도록' 광역응급의료상황실 운영 2일 대구 중구 경상권 광역응급의료상황실에서 상황의사와 상황요원이 지역 응급 의료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연합뉴스

◆의료기관별 기능 혼재, 경쟁과다·대형병원 쏠림 심화 = 보건복지부와 전문가에 따르면 의료기관은 그 역할과 기능에 따라 크게 1-2-3차로 나눈다. 1차의료기관은 가볍거나 만성인 질환을 주로 담당한다. 주로 동네의원이다. 2차 의료기관은 대개 중진료권 단위(인구 15~50만)에서 응급, 필수 급성기 질환과 중등증 질환이나 일부 중증질환까지, 주로 입원이나 수술이 필요한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 질환을 포괄적으로 치료하는 병원·종합병원의 형태를 취한다. 주로 대학병원이면서 상급병원인 대형 수련병원은 중증 희귀 난치질환이나 고도의 인력 집약적이고 전문적 질환을 치료하는 중증전문병원 역할을 하는 3차 의료기관이다.

이러한 의료기관별로 역할에 맞게 단계별로 협력하고 환자를 의뢰하는 체계를 ‘의료전달체계’라고 한다. 이 체계는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적정한 의료기관에서 환자가 적절한 진료를 제때 받도록 짠 것이다.

나라마다 이런 전달체계를 적절히 작동하게 하도록 다양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9년 전국민 의료보장제도(건강보험)을 도입하면서 이 체계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1998년 진료권(중진료권-시군단위, 대진료권-도단위) 폐지로 지역 간의 의료이용 제한에 실패하면서 의료기관 간 시설의 대형화, 고가 의료장비 경쟁, 의료기관의 과다 공급과 무분별한 영리적 수익경쟁으로 인해 전달체계가 거의 허물어졌다. 더욱이 선진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1차의료기관에서 주치의적 일차의료 기능이 작동되지 않아 동네의원과 대형병원이 경증환자를 두고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의료전달체계의 붕괴는 여러 문제를 가져왔다. 조 원장에 따르면 가벼운 질환조차 큰 병원으로 쏠려 정작 중한 환자가 제때 상급병원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경증환자가 몰리고, 인력과 공간이 부족해져 응급실 뺑뺑이의 한 원인이 된다.

의료비 상승과 지역 격차가 확대된다. 대도시에 몰려 몸집을 키우는 대형병원의 환자 집중은 건강보험 재정의 낭비와 국민 의료비 폭증의 한 원인이다. 지역 병·의원의 운영난을 심화시켜 지역의료 약화를 초래하여 지역 소멸을 가속화 한다.

전체의 40%나 차지하는 수입 창출을 위해 전문의(교수)는 외래진료가 주업이 됐다. 다음날도 예약환자가 가득한 교수는 당직은 물론 병실 환자 진료의 대부분을 전공의에게 맡긴다. 단지 수련받는 전공의들이 떠났을 뿐인데 그렇게 큰 병원의 업무가 거의 마비되는 이유다.

가장 큰 문제는 환자가 자신의 치료 경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병이 나면 그 이후 치료 과정을 안내해 줄 주치의가 없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거짓 정보와 의료기관에 대한 낮은 신뢰는 어쩔 수 없이 큰 병원만 찾는 이유가 되어 환자의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한다.

1일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가 의사를 기다리는 중. 연합뉴스

◆자의적 의료이용 제한 필요 = 의료전달체계는 이토록 큰 의미를 갖지만 의료기관들과 소비자인 환자 모두 깊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바로 세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다. 의료기관의 역할 정립과 협력체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조 원장은 우선 “전달체계의 최상위인 3차 대형병원의 백화점식 경영행태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증도와 희귀·난치질환의 정도에 따른 보상을 높여 중증·입원 환자 진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만성·경증 환자의 수월한 전원을 위해 의료기관 간 정보 공유 시스템을 구축한다.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개별 전문과목 개원을 억제하고 ‘포괄일차전문의 중심’의 일차진료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주민과 가까이에서 만성·경증 질환을 치료하고 질병 예방을 위한 건강생활을 안내하는 주치의제 도입이 시급하다.

지역거점병원의 확충이 중요하다. 일정 지역(중진료권)에서 일부 중증 및 중등증 질환과 제때 치료가 필요한 심뇌혈관 질환 등 응급진료 가능한 종합병원이 필요하다. 대도시는 500병상 이상, 중소도시는 최소 300병상 이상의 규모를 갖추고 20개 이상의 전문과목을 유지하며 지역에 발생하는 대부분 질환을 입원, 수술을 통해 해결할 능력이 있는 거점병원을 체계적으로 세워나가야 한다. 공공병원이 중심이 되고 예산제 기반의 운영이 타당하다.

그리고 환자의 자의적 의료기관 이용에 제한을 둘 필요가 있다. 주치의 상담에서 시작해 전달체계를 단계적으로 거쳐 치료를 받는 것이 한층 편리하고 효과적이라는 점을 부각해야 한다.건강보험 적용 제한 등 일정부분 강제적인 수단도 동시에 필요하다.

“우선 대형병원의 백화점식 경영행태를 개선해야 한다. 중증-난이도가 높은 환자들 위주로 봐야 한다.

지역에 응급-중증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인력과 장비를 갖춘 지역거점의료기관을 확충해야 하며

만성질환과 건강관리를 하는 주치의기관을 설치 운영해야 한다”

◆일차의료강화 기반 위해 의료전달체계 개편 = 국회입법조사처 김주경 입법조사관은 “지금과 같이 지방소멸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지역 내 의료전달체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시급하다”며 “의료기관 종별 기관 간 협력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으로의 환자 편중 현상을 해소하고 의료체계 내 자원 활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조사관에 따르면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의료기관 간 진료 의뢰가 타당해야 하고 회송이 원활해야 한다. 일차의료기관이 진료의뢰서를 남발하거나 상급종합병원이나 종합병원 등이 환자의 상태가 호전된 이후 비교적 간단한 처치 또는 지속적 관리가 필요한 경우 당초 의뢰했던 1차 또는 2차 의료기관으로 환자를 다시 의뢰하는 ‘회송’을 하지 않으면 의료전달체계가 유명무실해진다.

한편 의료전달체계 개편을 일차의료강화 기반 위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지금까지 전달체계 개편 작업은 하향식으로 주로 상급종합병원의 경증환자 진료를 줄이고 의뢰회송체계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접근됐으나 상향식 방식으로 일차의료 강화 위에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1월 22일 건강보험 재정을 3년간 3600억원 이용해 시작하는 ‘중증질환 강화사업’은 3개 상급종합병원(삼성병원, 인하대, 울산대)의 경증환자를 3년간 15% 줄이는 조건으로 손실보상차원으로 책정돼 있다. 일차의료에는 투자하지 않고 상급종합병원의 개혁으로 전달체계를 개편하려는 ‘잘못된’ 정책 접근이라는 것이다.

정 위원장에 따르면 일차의료를 강화하는 방법은 주치의제를 전면도입하고 환자등록제를 시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 동네의원의 행태가 일차의료기관으로서 역할하기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식의 혼합진료금지를 통해 선택적 비급여를 중심으로 하는 동네의원과 의학적 필요를 중심으로 진료하는 의원을 환자들이 구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연히 주치의제하 환자등록제로 가산되는 수가나 관리비용은 혼합진료금지 원칙하에서 건강보험 진료만 적용이 돼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건강보험 하나로도 일차진료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또한 의료기관이 부족한 지역에는 공공병원, 공공요양병원, 공공클리닉, 보건지소 등의 공공인프라가 공급돼야 전달체계 구축이 가능하다.

신영석 고려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진료권을 부활하고 ICT 기반 지역완결형 의료이용(전달)체계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신 교수는 5일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필수의료 강화를 위한 건강보험의 역할’ 토론회에서 “최고 중증(암 등)질환을 제외한 모든 질환에 대해 지역단위에서 대처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자”며 “70개 진료권에서 필수의료를 제공할 수 있는 시설 장비 인력을 갖춘 네트워크(2차포괄병원 포함 중소병원, 의원 등)를 구성하고 평생건강관리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장애인 고령인 등 네트워크 가입자와 일반환자에게 해당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을 밝혔다.

김규철 기자 gckim1026@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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