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철-US스틸 합병 막아선 바이든에 뿔난 일본
이시바 총리까지 나서 바이든 면전에서 “우려 불식해야”
일본제철 “정치적 결정, 절대 포기 안해” 소송전도 불사
언론도 앞다퉈 규탄 … 합병 더 부정적 트럼프 손에 달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달 초 일본제철이 추진하고 있는 US스틸 인수합병 절차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이 들끓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까지 나서 바이든 대통령의 결정에 우려를 표시하고, 일본제철은 소송전에 나서겠다고 선언해 양국간 외교갈등으로까지 번질 조짐이다.
이시바 총리는 13일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불허는 일본뿐 아니라 미국 경제계에서도 강한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며 “(바이든 대통령에) 우려를 불식시켜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고 밝혔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이시바 총리의 이날 발언은 미국과 일본, 필리핀 3국간 온라인 정상회담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일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제철이 US스틸을 약 140억달러(약 20조원)에 인수하려는 절차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바이든은 성명에서 “철강생산과 철강노동자는 미국의 근간”이라며 “미국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강력한 철강산업은 국가안보상 불가결한 우선사항”이라며 인수절차를 중지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처럼 이시바 총리까지 나서 바이든 대통령 면전에서 사실상 방침 변경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이라는 분석이다. 바이든 성명 이후 이와야 다케시 외무상과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등 일본 각료급 인사들이 명령에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은 데 이어 이시바 총리까지 나선 데는 일본 정부도 이 문제를 단순한 기업간 거래로만 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당사자인 일본제철도 강경한 대응을 예고했다. 하시모토 에이이치 일본제철 회장은 7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 당국의 안전보장에 관한 심사와 관련) 처음부터 결론을 짜놓은 정치권의 개입이 있었다”며 “중지명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인수계획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고 밝혔다.
하시모토 회장은 또 이번 인수합병 심사를 벌여온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와 관련 “정당한 절차로 심사가 진행됐다면 다른 결론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해 불신을 드러냈다. 일본제철측은 이번 바이든의 중지명령 과정에서 미국내 경쟁업체인 ‘클리블랜드클립스’가 전미철강노조(USW)와 연계해 친노조 성향 바이든 대통령을 사실상 움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제철과 US스틸 양측은 이번 결정과 관련 미국 정부를 상대로 직접 제소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내 여론도 비판적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설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내건) 국가안보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빈약하다”며 “부당한 정치적 개입에 따른 결정으로 강하게 비난한다”고 했다. 이 신문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이미 2023년 말부터 진행돼 온 양측간 인수합병 협상이 지난해 미국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정치적 쟁점으로 변질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일간 외교문제로까지 확산할 조짐을 보이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합병 추진 향방은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분석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이 사안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장 미국 재무부 산하 CFIUS가 11일 양측의 인수합병 폐기 기한을 당초 다음달 2일에서 6월18일로 연장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인수합병 중단을 명령하면 30일 안으로 인수계획을 폐기해야 하지만 이 시기를 넉달 가량 뒤로 미뤄놓은 셈이다.
문제는 바이든보다 더 강경한 트럼프행정부가 들어서면 인수계획은 보다 힘들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트럼프는 이와 관련 지난 6일 자신의 SNS에 “높은 수익을 내는 가치있는 기업이 될 수 있는데 왜 지금 US스틸을 매각하려고 하는가”라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기업이었던 US스틸이 다시 위대한 여정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일본제철이 트럼프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추가적인 투자계획 등을 제시하면 극적인 타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일부 나온다.
조강생산능력 세계 4위 수준인 일본제철의 이번 US스틸(세계 24위 수준) 인수 추진은 전세계 철강생산의 절반을 넘어서는 중국에 대응하면서 미국 진출을 가속화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번 인수합병 배경에는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미국 시장의 수요에 적극 대처하겠다는 의도가 강하다”며 “일본제철은 전기자동차(EV) 모터 등에 사용하는 강판에서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고, US스틸이 보유한 지구온난화가스 배출을 억제하는 기술력이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제철은 1950년 창립해 전세계 15개 국가 이상에 생산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 최대 철강기업이다. 2022년 기준 총 조강생산능력은 약 4400만톤으로 일본내 생산량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세계 4위 수준 철강기업이다. 지난해 3월 말 기준 전체 종업원은 11만3500여명, 2023년 매출은 약 8조9000억엔(약 78조5000억원), 순이익 약 8100억엔(약 7조6000억원) 규모이다.
US스틸은 2023년 기준 연간 조강생산능력은 1550만톤 수준으로 세계 철강업계 24위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1901년 창립해 한때 뉴욕 국제연합(UN) 본부 건물 등을 지을 때 철강재를 공급하는 등 세계적인 철강기업으로 명성을 떨쳤던 미국 철강업계의 상징적 존재다. 하지만 미국 철강산업의 쇠퇴와 함께 현재는 펜실베이니아 공장 등에서 1만4000여명이 종사하고 있다.
한편 전세계 철강업계는 중국의 막대한 물량공세 등 공급과잉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다. 세계철강협회(WSA)에 따르면, 중국은 2023년 기준 전세계 철강 생산(18억5000만톤)의 절반을 넘는 10억2000만톤 가량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철강업체 상위 10곳 가운데 중국업체는 1위인 바우오그룹을 비롯해 모두 6개 기업이 포진하고 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