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휴전’ 급진전에 당황한 유럽
미·러, 사우디 협상 급물살 … 유럽 정상들 17일 파리서 긴급회동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와 유럽 주요국이 배제되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1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협상을 즉시 시작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이번 주 사우디아라비아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주축으로 한 협상팀을 파견했다. 이들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회담을 통해 종전 방안을 논의하며, 조기 휴전과 미러 정상회담 개최를 추진 중이다.
문제는 이 협상에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배제됐다는 점이다. 키스 켈로그 미 우크라이나 특사는 “대규모 그룹 토론은 협상을 망가뜨린다”며 유럽 참여를 거부했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협상 초기 단계에서 유럽 개입은 비현실적”이라고 선을 그었다.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를 배제한 비밀 거래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유럽 역시 안보 문제가 단독 결정되는 것에 위기감을 표했다.
불만이 커지자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협상 참여 여부에 대해 “그도 관여할 것”이라고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방식이나 시점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유럽 각국은 미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휴전 협상에서 배제되는 것을 우려하며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유럽 주요국 정상들을 초청해 비공식 긴급회의를 개최한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등 주요국 정상들과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회의에서는 유럽이 종전 협상에서 배제된 데 대한 대응책과 전후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총리실은 키어 스타머 총리가 이번 회의에 참석하며, 이달 내로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할 때 유럽의 입장을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U 관계자들은 이번 회의를 통해 유럽이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뤼터 NATO 사무총장은 “유럽이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위한 ‘좋은 제안’을 내놓아야 한다”며 “발언권을 얻으려면 더 유의미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유럽 각국이 방위비를 대폭 증액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의 ‘안보 무임승차’를 지적하며 미국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더 이상 돈을 쓰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유럽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이달 23일 독일 총선 이후 새로운 군사 강화 계획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유럽은 평화유지군 파병 규모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방안도 검토 중이다. 또 유럽군 창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NATO 내에서의 역할 확대와 병행해 추진될 전망이다.
미국은 최근 유럽 동맹국들에게 외교 문서를 보내 우크라이나 종전 합의의 일환으로 유럽이 어떻게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 유럽 외교관은 “유럽이 협상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면서도 그에 따른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유럽 주요국들은 협상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과 ‘거래’를 해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스타머 영국 총리는 “유럽이 NATO에서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며 “동맹의 분열이 오히려 외부의 적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유럽이 자체적인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가장 큰 문제는 유럽이 방위비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일례로 유럽이 4만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을 우크라이나에 주둔시 10년간 300억 달러의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대해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잭 와틀링 선임 연구원은 “유럽에는 군사력 강화를 위한 자금이 있지만, 그것을 실제로 사용할 의지가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