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기업들 새 전략은 ‘중국말고 어디든’”

2025-02-18 13:00:03 게재

반도체·서버·가전기기 등

미중 갈등에 생산지 이전

중국기업도 해외공장 설립

미·중 무역 긴장이 높아지면서 서구 테크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중국 이외 지역으로 이전하는 움직임에 속도가 붙고 있다고 미 경제전문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최근 몇 년간 다국적 기업들은 중국 공급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중국 기반 공급업체에 다른 국가의 공급업체를 추가하는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1) 전략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제는 공장을 아예 중국 바깥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다른 지역에서 공급업체를 찾는 ‘중국 말고 어디든’(Anything But China·ABC)이라는 ‘ABC’가 새로운 전략이 되고 있다고 WSJ는 진단했다.

이 신문은 “이런 추세는 아시아와 남미 국가들이 가치 사슬에서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설 기회를 주고 있다”면서 “많은 중국 기업들도 서구 고객사들의 요청으로 해외에 공장을 설립하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시기 중국의 봉쇄 조치로 서구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베트남이나 인도로 대거 이전하는 ‘초기 다변화 단계’가 시작됐다. 이후 첨단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경쟁은 이런 변화에 속도를 더했고, 특히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가 점쳐지면서 중국을 탈출해 공급망을 다변화하라는 압박이 커졌다고 이 매체는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모든 중국 수입품에 10% 관세를 추가로 부과했고 중국도 맞대응에 나서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초기 단계에선 기업들이 단순 조립 공정만 중국 외부로 이전했던 것과 달리 현재는 센서와 인쇄 회로 기판, 전력 전자 장치와 같은 부품을 만드는 공장 자체를 이전하고 있다.

특히, ‘ABC’ 추세는 미·중 간 기술 갈등의 핵심인 반도체와 관련된 제품에서 두드러진다.

지난 2년간 미국은 중국이 최첨단 칩과 장비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고, 이에 중국은 자체 칩 개발을 추진해왔다. 이전에는 중국이 세계 서버 생산의 가장 큰 허브 중 하나였지만, 미국이 2022년 10월 인공지능(AI) 칩의 중국 수출을 제한한 이후 AI 서버 조립은 멕시코와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점점 더 많이 이뤄지고 있다.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와 공급업체들도 중국 의존도를 줄였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와 램 리서치는 지난해 미국 정부 압력으로 중국 기업을 공급망에서 제외했다. 반도체 생산 전력 시스템을 만드는 어드밴스드 에너지는 오는 7월까지 중국의 마지막 공장을 폐쇄할 예정이다.

테크 기업들의 중국 이탈은 스마트폰에서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소비자 기기 전반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중국 주재 미국상공회의소의 연례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 360여곳 중 30%는 생산 기지 이전을 고려하거나 이미 시작했다고 했고, 기술·연구개발 관련 기업의 약 25%는 공급망을 이전하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WJS는 서구 테크 기업들이 최첨단 칩, AI 서버, 소비자 기기의 생산과 조립을 이전하면서 동남아시아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2018년 1550억달러에서 2023년 2300억달러로 70% 늘었다. 칩 제조업체 인텔, 인피니온, 마이크론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고 노트북 제조업체 HP는 지난 3년간 조립 기지에 태국을 추가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지난해 반도체, 컴퓨터 및 기타 전자 제품 수출액이 사상 최대인 1370억달러를 기록했다.

2023년까지 중국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노트북 컴퓨터를 생산했다. 하지만, 시장조사기관 트랜드포스는 올해 이 비중이 80%로 줄어들고, 베트남과 태국 비중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베트남의 경우 엔비디아가 지난해 12월 연구 개발 센터 설립을 발표했다.

고급 칩을 설계하는 마벨테크놀로지는 지난 1년간 베트남에서 엔지니어 인력을 300명에서 약 470명으로 증원했고, 향후 수년간 매년 20%씩 인력을 늘릴 예정이다.

WSJ는 많은 중국 기업도 서구 고객들의 요청에 따라 해외로 이동 중이라며 현황을 소개했다.

중국의 데이터 센터용 광 트랜시버 제조업체인 이옵토링크는 해외 고객에 대한 공급을 늘리고 미·중 긴장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 태국 공장을 확장했다. 노트북 컴퓨터, 태양광 패널 및 산업 기계용 납땜 재료를 생산하는 바이탈 신소재는 동남아시아와 멕시코에 자회사를 설립했다.

기업들이 탈중국을 가속화하고 있지만, 중국의 인프라와 공급업체, 노동 생태계를 따라잡을 수 있는 국가는 아직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고 WSJ는 지적했다.

시장조사기관 IDC 분석가 마리오 모랄레스는 “기술 공급망의 가치가 이미 1조달러를 넘었다”면서 “중국을 벗어나 장기적으로 새로운 생산 라인을 구축하는 것은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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