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브렉시트 5년, 영국경제는 계속 고전 중

2025-02-20 00:00:00 게재

2020년 1월 31일 밤 11시. 영국 총리 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대형시계가 11시를 알리자 브렉시트라는 초대형 글자가 깜박거렸다. 인근의 의사당 웨스트민스터에 운집했던 수만명의 시민들이 환호하며 이 순간을 축하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를 지지한 시민들은 ‘독립일’이라는 로고가 쓰인 셔츠를 입고 환호했다.

하지만 지난달 31일 5주년 기념식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영국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에 더 크게 노출돼 있다.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보호무역주의가 한층 강화되고 중국의 공세 등 대외환경은 악화되는데 영국경제는 이런 일련의 리스크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브렉시트 단행 후 영국경제는 아직도 저성장을 면치 못하며 식민지였던 인도보다 경제규모가 작아졌다. 또 브렉시트 후 영국이 내세울 만한 국가 브랜드 재정립도 쉽지 않다.

1만6400개 중소기업 EU 수출 중단

런던정경대학교 경제실적센터는 EU와 교역을 하던 영국 기업을 조사해 브렉시트 가 기업에 끼친 영향을 점검했다. 이에 따르면 1만6400개 중소기업이 브렉시트 후 EU시장으로의 수출을 중단했다. 영국은 탈퇴 후 EU와 무역협력협정을 체결해 무관세 무쿼터 교역에 합의했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은 통관서류 작성 등 별도의 비용을 부담해야 했고 이를 견디지 못하고 EU 시장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단기간에 다른 시장을 개척하는 것도 어려웠다. 영국이 EU 회원국이었을 때에는 회원국 간 단일시장(내부시장)이 형성돼 아무런 장벽 없이 상품과 서비스를 수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탈퇴 후 여러가지 추가 비용이 발생했고 이는 기업의 채산성을 악화시켰다.

브렉시트 전 영국 교역의 절반 정도가 EU와 이뤄졌다. 그런데 탈퇴 후 EU와의 교역은 감소했지만 미국이나 인도 등 다른 국가와의 교역이 감소분을 상쇄하지 못했다. 연구진은 영국의 무역이 브렉시트 이전과 비교해 수출은 6.4%, 수입은 3.1% 정도 줄어들었다고 추산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교역과 비교해도 영국의 부진이 두드러진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OECD 회원국의 연간 수출 증가율은 4.2%였지만 영국은 겨우 0.3%에 불과했다.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에서 유권자들은 3.8%p 차이로 EU 탈퇴를 결정했다. 당시 브렉시트를 지지한 이들이 그래도 믿는 구석이라고는 미국이 있었다. 규제가 많은 EU에서 탈퇴해 미국과 함께 자유무역을 주도해 보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런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미국은 EU에 이어 영국의 두번째 교역 상대국이다. 그러나 영국의 대미 교역은 EU무역의 1/3에 불과하다. 트럼프는 2017년 취임 후 유럽과 영국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보호무역 정책을 본격화했다. 전임자 오바마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 상당한 진전을 보였던 EU와의 자유무역(FTA) 협상은 중단됐다. 트럼프의 후임자 바이든 대통령 때에도 미국은 영국과의 FTA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 식민지 인도에도 밀린 영국경제

경제성장률 제고에 우선순위를 둔 영국 노동당정부는 인도와의 FTA 협상을 다시 시작했다. 원래 2022년부터 보수당정부가 시작했는데 두 나라의 선거로 협상이 1년 정도 중단됐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인도는 영국의 13번째 교역 상대국이다. 최종 협상 결과에 따라 FTA 체결이 양국 성장에 미칠 영향이 상이할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 1위 교역 상대국인 EU, 2위인 미국을 그대로 두고 인도와 FTA를 체결해봤자 그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2022년부터 5%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인도는 2021년부터 경제규모에서 영국을 추월했다. 영국경제는 이 기간 중 1% 정도의 성장에 그쳤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인도 GDP는 4조1100억달러, 영국은 2조3400억달러다. 식민지였던 인도가 경제성장률과 경제규모에서 제국이었던 나라를 앞질렀다.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의 재집권 후 관세전쟁이 본격 시작된 가운데 영국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영란은행은 지난 6일 올해 경제성장률을 0.7%로 크게 하향했다. 작년 말 전망보다 무려 절반 정도를 낮췄다. 트럼프발 관세전쟁이 불확실성을 높여 교역 감소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2024년까지 EU의 총 성장률은 영국보다 1.8%p 높았다.

지난해 7월 4일 조기총선에서 하원 의석의 거의 2/3를 차지해 압승한 노동당은 경제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 각종 정책을 이행해 왔다. 그러나 국내외 산적한 어려움으로 노동당 지지율은 벌써부터 곤두박질쳤다.

비필수적 인력의 이민금지 등을 공약으로 내세운 극우 포퓰리스트 영국개혁당은 지지율 기준으로 제1정당이다. 지난 4일 유거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개혁당은 25%로 노동당보다 1%p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거의 300년이 된 보수당은 지난 총선에서 참패한 후 당수를 교체했지만 개혁당에 제1야당 자리를 내줬다.

집권 노동당은 불법 이민자 강제 추방을 강화하며 포퓰리스트 정당의 세력 강화에 대응중이다. 전문가들은 이민 단속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률 제고가 극우세력의 대두를 저지할 수 있다고 본다.

‘글로벌 영국’ 다음에 무엇이 오나

브렉시트가 영국에 끼친 영향은 경제뿐만이 아니다. 지역블록 EU에서 탈퇴했지만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영국의 국가 브랜드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호하다. 2016년에 치러진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한 진영은 정당이 아닌 여러 세력 연합이었다. 강력한 이민 통제를 내세운 극우정당도 있었고 보수당 진영에서 국가 주권을 우선하는 세력도 있었다. 여론조사와 다르게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 찬성결과가 나오자 보수당정부는 ‘글로벌 영국(Global Britain)’을 영국이 나갈 방향으로 제시했다. 규제가 많고 비좁은 EU에서 탈퇴해 19세기 대영제국처럼 21세기에 자유무역을 제시하고 더 넓은 세계와 교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 집권해 브렉시트를 단행하고 정책을 실행했던 보수당은 이 구호와 정반대의 정책을 실행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주역으로 총리가 된 보스리 존슨(2019.7~2022.9)은 해외원조 예산을 대폭 줄였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저성장이 지속되면서 이 예산이 타깃이 됐다. 2021년 7월 존슨은 해외원조 예산을 국내총소득(GNI)의 0.7%에서 0.2%로 삭감했다. 당시 선진 7개국(G7) 가운데 영국의 원조예산 삭감폭이 가장 컸다.

전임 보수당 총리들은 유엔이 회원국에 권고한 GNI 대비 해외원조 예산 0.7%를 법으로 정해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존슨은 예산에 쪼들리자 글로벌 영국 실현에 중요한 정책수단인 원조를 대규모 축소했다. 트럼프가 재집권하자마자 국제개발처(USAID)를 폐쇄하고 원조 예산을 대규모 삭감했다지만 영국이 그보다 먼저였다.

14년 만에 집권한 노동당은 EU와의 관계를 점진적으로 개선중이다. 오는 5월 EU와 첫 정례 정상회담이 열린다. 가장 큰 EU시장으로의 접근성을 늘려야 영국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약간의 관계개선도 보수당과 영국개혁당은 ‘브렉시트 번복’이라고 공격한다. 이 때문에 비교적 반발이 적은 EU와의 안보조약 체결에 주력중이다. 2년 전부터 브렉시트가 잘못된 결정이라는 대답이 최소 20%p 높은데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 노동당이 브렉시트 후 영국의 정체성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구호를 내기가 어렵다. 글로벌 영국은 진작 폐기처분 됐지만 트럼프 2.0 시대에 대응하는 영국의 국가 브랜드 정립은 요원하다.

안병억 대구대 교수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