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까치밥이 알려준 감 이야기

2025-12-16 13:00:01 게재

지방 특산자원을 국가 부처에서 지원해주는 과제가 있었다. 과제심사를 한 날이 마침 첫눈이 수북이 내린 날이었다. 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굵은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었다.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불편함보다 한적한 눈길을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앞섰다.

눈에 취해 차를 운전하다보니 길을 잘못 들었다. 월출산 자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를 잠시 주차하고 월출산에 취해 산허리를 눈으로 좇다보니 산 아래 마을에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잎을 잃고 눈을 위태하게 얹은 가지에 휘청하듯 감이 달려있었다. 하얀 눈을 바탕으로 주황빛을 끝까지 붙들고 서 있었다. 그제서야 그 지역 과제 주제가 ‘감’이었던 것이 기억났다.

감은 과육 껍질 씨 잎 심지어 떫은 미숙과까지 고유한 생리활성 성분과 다양한 쓰임새가 있다. 단감의 껍데기는 주황색 특유의 베타카로틴과 크립토잔틴등 카로티노이드이며, 과육부분은 고유의 단맛뿐 아니라 비타민 A와 C, 칼륨과 식이섬유, 그리고 폴리페놀과 카로티노이드가 모여 있는 항산화 덩어리다(홍시는 정말 숙취에 탁월하다). 미숙과에서 나타나는 떫은 맛은 프로안토시아니딘이라 불리는 축합형태의 탄닌이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는 비타민 C보다 20배, 비타민 E보다 50배 강한 항산화력을 가진다. 감잎은 또한 과육보다 비타민과 폴리페놀 농도가 훨씬 높다.

낙엽으로 버리기도 아까운 감잎

예전부터 감잎은 중국 일본과 함께 차로도 마셨는데 감잎의 플라보노이드와 트리테르페노이는 항산화력이 높고 고혈압 당뇨 비만 염증 알레르기에 효과가 있다. 화장품 업계에서는 감잎 추출물을 미백 항주름 항산화 탈취기능의 스킨케어용으로 활용한다.

떫은 감의 프로안토시아니딘은 일종의 축합탄닌인데 이는 수분을 흡수해 조직을 수축하는 작용을 해 장의 연동운동을 억제하고 변비를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떫은 감을 많이 먹거나 껍질째 과잉 섭취하는 것은 탄닌이 단백질 섬유질과 엉켜 변비를 심화시킬 수 있으므로 변비가 두려우면 잘 익은 단감을 섭취하는 게 좋다. 떫은 맛은 수용성 탄닌이 혀로 침습하면서 느껴지는 자극이다. 단감이 되면 탄닌이 불용성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한 방법을 ‘탈삽(脫澁, Deastringency)’이라고 하는데 아마 일본에서 쓰이던 용어 같다. 두고두고 입에 낯설다. 자연적으로 후숙이 진행되면 떫은 맛이 없어지며 인위적으로는 온탕, 알코올(소주, 에탄올), 이산화탄소 가스, 저온처리 등을 사용한다.

호랑이도 무서워하는 곶감은 옛날에도 구하기 힘든 간식이었지만 지금도 가격이 호락호락 하지는 않다. 곶감은 떫은 감을 껍질을 제거하고 매달아 숙성과 건조를 시키게 된다. 1~2주 정도 지나 수분이 1/3정도 빠지면 이를 주물러 섬유질과 씨주변을 풀어주고 건조를 계속해 완성한다. 다량의 수분이 빠져나가니 당연히 곶감은 당도가 높아지고 겨울철 두고두고 먹을 간식이 된다. 단맛만이 아니라 비타민과 폴리페놀, 카로티노이드가 농축되니 비타민 섭취가 부족한 겨울철에는 약과 다름없는 간식이었다고 본다.

곶감을 제조할 때 곶감의 저장성을 향상시키고 조직을 개선하고 색을 선홍색으로 상품가치를 높일 수 있어 유황훈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남는 이산화황은 일정량 이상이면 알레르기 표시 의무가 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원료 첨가 여부와 공정 특성 때문에 표시가 제외되기도 한다.

곶감의 색이 자연스러운 갈색이라기보다 투명감을 띠는 선홍색에 가깝고, 표면에 흰가루가 상대적으로 적다면 유황 훈증 처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건조과실의 이산화황 잔류기준을 2000ppm(2g/kg)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곶감 겉의 흰가루를 오염물질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이는 감 내부의 당이 건조되면서 표면으로 석출되어 생긴 것이다. 주로 포도당 결정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전통적으로 흰가루(시상, 柿霜)가 잘 오른 것을 좋은 곶감으로 본다. 그런데 ‘감의 서리(柿霜)’라니. 이런 시적인 표현이.

까치밥에 얽힌 어린시절 기억들

어린 시절 우리 집 뜰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가을 끝무렵이면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이를 따는 것도 일이었다. 야무지게 감 하나 남기지 않고 따려고 애를 쓰면 어머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까치밥은 남겨두라는 것이었다. 겨울 날 몰래 날아와 부리로 콕콕 찍으면서 감을 먹는 까치를 보는 것도 낙이었다.

까치밥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겨울철 새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였다. 월출산 자락 눈 덮인 감나무에서 본 주황빛이 문득 그리운 날들이다.

김기명 푸도슨트식품연구소 연구소장, 식품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