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중도보수·실용행보’, 소리만 요란…“답 내놔야”
조기 대선 가능성에 정치권 이 대표 주목도 급상승
야당 한계, 구호에 그칠 수도 “반복되면 거부감 커져”
“개헌 이야기를 하면서 ‘이재명 대표 한 사람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더라. 수십년 된 국가적 과제의 열쇠를 이 대표가 쥐고 있다? 이 대표가 대세에 올라탄 것은 확실히 맞는 것 같다”
헌법재판소가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앞둔 가운데 정치권의 가장 큰 스피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현안은 물론 인공지능 같은 정책의제에 대한 이 대표 입장 하나하나에 찬반 공세가 이어진다. 전직 총리·국회의장 등 국가 원로들이 모여 개헌도 이재명 대표를 설득하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는 정도다. 조기 대선이 실시될 경우 정권교체를 기대하고, 그 선두에 이재명 대표가 있다고 보는 여론이 우세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갤럽 2월25~27일. 1000명. 가상번호 전화면접.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p. 응답률 14.5%. 이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이 대표도 이런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중도보수’라는 정치적 지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며 정권교체 가능성을 키우는 한편 미뤘던 현안에 대한 정책 구상을 내놓고 있다. 이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이 170석에 달하는 원내 1당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의 대선공약”이라는 평가가 무리는 아니다. 관건은 ‘이재명은 절대 반대’를 외치는 여당의 반대가 여전한 상황에서 탄핵정국과 함께 집중조명된 실용행보에 걸맞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느냐이다.
이재명 대표는 5일 국회에서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와 함께 민생경제간담회를 갖는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추진해온 ‘주주에 대한 이사 충실의무’를 담은 상법 개정안과 주52시간 예외조항을 두고 논란이 불거진 반도체특별법에 관한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다. 이 대표는 3월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상법을 개정하겠다고 강조했고, 민주당은 주주 보호를 통한 주식 시장 정상화 등을 주장하고 있다. 한경협 등 경제단체는 기업 경영권 침해 소지가 있다며 상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반도체법도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만 담은 특별법을 우선 통과시키고 52시간 예외 문제는 장기적으로 토론하자는 입장이다. 여당과 기업계에서는 반도체 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해 주52시간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대표는 이어 오는 20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삼성 청년 SW 아카데미’(SSAFY)를 찾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만난다. SSAFY는 삼성전자와 고용노동부가 참여해 국내 정보기술(IT) 생태계 저변을 확대하고 청년 취업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청년들을 교육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프로그램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경제위기 속에 가장 고충이 큰 청년들의 사회진출을 위한 심도 있는 대화와 지원방안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대미 통상 문제와 국내 경제 문제 등이 토론 주제로 잡혀있진 않지만, 논의 소재로 열려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선 조기 대선 정국을 앞두고 유력한 차기 주자와 국내 대표 대기업 총수와의 접촉에 주목하는 눈치다. 이 대표와 이재용 회장과의 면담을 ‘중도보수’ 지향을 내세운 이 대표의 실용행보의 상징이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 대표의 실용행보를 놓고 국민의힘 등 정치권이 진정성 운운하는데 성장을 통한 민생회복과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 대표의 소신은 확고하다”면서 “특히 기업의 해외 활동 등 통상문제에는 진보-보수, 여야를 초월해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최근 경제·외교 이슈에 메시지를 집중하고 특히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후 국회차원의 통상문제 특위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인공지능 투자를 강조하며 이른바 ‘K-엔비디아 지분공유론’을 펴 눈길을 끌었다.
지난 2일 민주당 유튜브 채널과의 대담에서 인공지능(AI) 관련 투자를 언급하며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AI 관련 기업에 국부펀드나 국민펀드가 공동 투자해 지분을 확보하고, 그 기업이 엔비디아처럼 크게 성공하면 국민의 조세부담을 경감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대표의 발언 뒤에 국민의힘은 4일 “사회주의적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4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이 대표는) AI 추경을 운운하며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탄생하면 그 지분의 30%를 국민에게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이 대표는 입만 열면 거짓말과 모순투성이란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김상훈 정책위의장은 “소유부터 나누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고 말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도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 대표의 ‘K-엔비디아 지분공유론’에 대해 “괴상한 경제관이 아니라 위험한 경제관”이라고 밝혔다.
이어 “국민연금조차도 연기금을 운용하며 국내 주식에 투자할 때 지분율 10% 이상을 갖는 것에 극도로 신중하다”며 “그런데 국가가 기업 지분 30%를 가져가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을 국민과 나눠 갖겠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라고 했다.
이재명 대표는 4일 페이스북에 서 “AI(인공지능)가 불러올 미래에 대한 무지도 문제지만, 한국말도 제대로 이해 못 하니 그런 수준의 지적 능력으로 어떻게 대한민국을 책임지나”라며 “극우 본색에 문맹 수준의 식견”이라고 반박했다. 이광재 전 국회사무총장도 국민의힘 등의 비판에 대해 “싱가포르 테마섹, 노르웨이 국부펀드, 중동 국부펀드처럼 국부를 전략적으로 투자해 미래 기술을 키우고 국민에게 돌아오는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라고 밝혔다.
민주당 안에선 이 대표가 던진 정책의제에 정치권이 반응하는 대표적 사례라며 ‘나쁠 것 없다’는 입장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일단 이재명 대표의 정책은 반대하고 보자는 식의 편협한 시각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고 국민 동의도 구하기 어렵다”면서도 “그나마 직면한 정책의제를 놓고 쟁점이 만들어진 것 자체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정치적 이득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새로운 이재명’을 뒷받침 할 성과를 내놓지 못하는 일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는 “이 대표의 정책 실용행보는 분명 보수성향의 중도층에게 신뢰감을 제고할 수 있는 요소”라면서도 “주52시간 반도체 이야기 하면서 노동시간 유연성 이야기를 꺼냈으면 답을 내놓고 그 다음 문제로 넘어갔어야 신뢰를 얻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대표가 제기한 후 성과를 보지 못한 반도체법·추경·상법 등은 국민의힘의 반대 등이 작용했지만 여론은 ‘이 대표가 정말 최선을 다했나’라고 물을 것”이라면서 “새로운 이재명, 뉴이재명을 기대하는 중도보수층에게 ‘지키려고만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