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정치셈법만 따지다 또 무산되나…“위기탈출용 공세 안돼”
여야 차기 대선 주자, 너도나도 개헌 카드
‘대통령 임기단축’ … 이재명 견제용 의심
“대선에서 약속하고 대통령 임기 초 진행”
여야 차기 대선 주자들이 앞다퉈 개헌 카드를 내놓았다. 정치권 원로들도 ‘개헌의 적기’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탄핵심판을 받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도 헌법재판소 최후진술에서 “직무에 복귀하면 개헌과 정치개혁 추진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야당의 가장 강력한 차기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내란종식에 집중해야 할 때”라며 개헌 논의에 거리를 두고 있다. 내란사태로 궁지에 몰린 여권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재명 대표만 동의하면 된다”며 공세를 취하고 이 대표는 “지금 개헌 얘기를 하면 블랙홀이 된다. 빨간 넥타이 매신 분들이 좋아하게 돼 있다”고 거부입장을 분명히 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개헌 카드가 정치 공세의 소재가 됐다는 뜻이다. 역대 정권마다 정치 셈법만 따지다가 번번이 좌초된 경험이 반복될 공산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위기 벗어나기 위한 정국 해소용 = 국민의힘 대선 주자들 중심으로 권력구조를 4년 중임제로 변경하고 임기단축 개헌을 실시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한동훈 전 대표, 유승민 전 의원 등이 찬성 입장을 밝힌 상황이다.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임기단축을 약속하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5년 단임의 현행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바꾸는 대신 차기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줄여 오는 2028년 총선과 함께 대선을 치르는 것을 골자로 한다. 과도한 권한이 집중된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이고 정권의 책임성을 높이는 한편 대통령 임기를 줄여 정치인의 희생을 보여주자는 취지다. 야권에선 김동연 경기지사가 비슷한 주장을 내놓았다.
반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개헌 논의를 할 경우) 헌정 파괴에 대한 책임 추궁 문제가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며 “(개헌 논의가) 국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급하지 않다. 지금은 헌정 질서 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 대표는 지난 2월 MBC 백분토론에 출연해 “지난 대선 때 이길 거라고 생각했고 그 때 명확하게 낸 개헌안이 있다”면서 “임기 1년을 단축해서 할 생각이었다. 그건 명확했다”고 했다. 당시 이 대표는 4년 중임제, 결선투표제 등을 약속했다.
여당 주자들이 ‘개헌 스피커’를 자처하고 나서고, 이 대표가 선을 개헌논의과 선을 긋고 있는 것 모두 ‘정국 주도권’과 무관하지 않다. 내란사태 이후 윤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벗어나려는 국민의힘으로선 국민적 관심도가 높은 권력구조 개편 등 개헌이슈를 부각해 국면을 전환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이재명 대표 또한 압도적인 탄핵여론을 정권교체로 이어가려는 상황에서 새로운 이슈 등장이 불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후에는 이에 대한 찬반을 둘러싼 목소리가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임기 초엔 거부, 동력 떨어진 후반부에 치중 = 역대 정권에서도 개헌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과 여권이 대통령 권한과 임기를 줄이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거나, 혹은 국정동력이 떨어진 임기 말에 정국 돌파용으로 꺼내면서 번번이 실패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2년차인 1999년 대선 공약이었던 내각제 개헌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3년차에 ‘대연정’ 제안을 내놨고 임기 마지막해에 가서야 대통령 4년 연임제 입장을 내놨다. 이명박·박근혜정부 때에도 정치권 안에선 개헌 언급이 있었으나 대통령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박근혜 탄핵 촛불로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초반 개헌안을 내고 실제 개헌을 추진한 것이 이례적이다. 문재인정부는 청와대를 중심으로 개헌안을 마련해 국회에 넘겼으나 당시 야당의 반대로 투표조차 진행하지 못하고 폐기됐다. 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에는 지방분권 명분화·4년 중임제·결선투표제·감사원 독립 등 현재 논의되는 내용 다수가 포함돼 있었으나 야당의 표결 거부로 국회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대선 기간 내내 개헌을 공약하라고 윽박지르던 국민의힘 등은 대통령 개헌안에 대한 국회 표결을 거부해 버렸다”며 “결국 의결정족수에 미달해 문 대통령의 개헌안은 투표 불성립되고 말았다”고 했다. 당시 개헌안 표결에 불참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전신)은 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에 대해 정부가 아닌 청와대가 주도하면서 진정성이 의심된다며 “발의를 위한 개헌안”이라고 반발했었다.
◆개헌 약속하고 임기 초에 논의해야 = 레임덕이 우려되는 임기말에 꺼낸 개헌안은 동력이 떨어지고, 대통령 임기 초에 꺼낸 개헌에 대해선 ‘진정성’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개헌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최재성 전 문재인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은 “개헌 논의의 동기가 일종의 국면 전환용이고, 실제로 개헌 논의로 가자고 하면 오히려 (여당이) 발을 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는 “여야를 떠나 개헌 필요성에는 이미 공감하고 있고, 이재명 대표도 지난 대선에서 공약했었다”면서 “이 대표가 개헌과 관련한 자신의 계획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최근 SBS ‘편상욱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 “개헌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정치 세력이 개헌에 동의해야 하고, 개헌 및 권력 구조 문제에 대해 양 정치 세력이 접근성 있는 해법을 들고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 의장은 1·2차 개헌을 나눠 순차적인 진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민주당 안에서도 박지원 의원 등이 “(조기 대선에 출마하는) 대통령 후보자들이 개헌을 공약하고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된다”고 주장한다. 진성준 정책위 의장은 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 파면 결정을 하고 나면 곧바로 이어질 대선 국면에서 개헌 논의는 봇물처럼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나라를 경영하고자 하는 대선 후보들이 자신의 비전과 구상을 헌법 개정안으로 말할 것이다. 대선기간 동안 후보들이 행할 공약과 토론 등의 경연 과정을 거치고 국민의 지지와 선택을 확인한 후에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갤럽 조사(4~6일. 1003명. 가상번호 전화면접. 95% 신뢰수준에 ±3.1%p. 응답률 14.2%.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에서 대통령제 개헌에 대해 ‘필요하다’가 54% 였고, 대통령 임기에 대해선 ‘4년 중임제’가 64%였다. 대통령 권한과 관련해선 현행 유지 43% 축소 35%였다.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