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 이중구조

한국판 ‘산업·노동 4.0위원회’ 만들어 개선 나서자

2025-03-21 13:00:03 게재

30년간 대-중소기업 연봉차이 13억원, 골병드는 한국의 경제와 사회 … 노·사는 물론 진보와 보수 모두 머리 맞대야

“지금의 노동시장은 노동과 자본 구도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중·다층 생태계다. 30여년 걸쳐 심화된 문제로 단기간에 파격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 노사정을 포함한 각계각층, 그리고 진보·보수 등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2차 노동시장 당사자가 조직돼 목소리를 내야 한다.”

14일 서울 금천구 한국노동재단(재단)에서 만난 한석호 재단 상임이사의 첫 일성이다.

재단은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목표로 지난 1월 22일 창립했다. 국내 노동분야에서 민간차원으로 만들어진 첫 재단 법인이다. 이사진에 비정규·중소·하청·플랫폼·프리랜서 등 2차 노동시장 당사자가 1/3 참여한다. 노동계뿐만 아니라 경영계와 시민사회도 함께한다. 송경용 신부와 이미영 대리기사가 공동이사장이다. 재단은 2차 노동시장 당사자들의 조직화와 지원활동을 한다. 당사자의 목소리로 사회적 대타협의 흐름을 형성하고 정부와 국회 등을 통한 법·제도 개선 및 실효적 지원 대책이 마련될 수 있도록 정책에 개입한다. 이것이 재단을 창립한 첫째 이유라고 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는 노사정 모두가 해소를 주창해왔지만 오히려 확대·고착화되고 있다. 한 상임이사는 10년 전 조직운동의 소득이 상위 10%에 진입했다는 주장부터, 노조의 사회연대기금 조성 등에 앞장서왔다. 그에게 현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방향에 대해 들었다.

한석호 한국노동재단 상임이사는 1983년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에 입학해서 학생운동을 하고 1988년부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선봉대와 금속산업연맹 선봉대를 거쳐 민주노총에서 조직실장 사무부총장 사회연대위원장 등을 역임한 38년째 노동운동의 산증인이다. 윤석열정부 ‘상생임금위원회’에 참여하고 전태일재단 사무총장때 조선일보의 노동시장 이중구조 공동기획을 주도하는 등 기존 노동계와는 다른 행보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다른 노동단체와 달리 경영계 인사가 재단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경영계 출신으로 금동혁 우리밀 회장, 전 현대제철 전무였던 김경식 ESG(환경·사회·지배구조)네트워크 대표가 참여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갈등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가장 심각한 갈등이 진보·보수 갈등이고 두번째가 정규직·비정규직의 갈등이다. 그리고 노사갈등이다. 전통적 노사갈등보다 노노갈등을 더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파이를 나누면 몫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반대하는 노노갈등은 실재하는 현상이다. 노동계만의 힘으로는 풀 수 없다. 노사를 비롯한 전사회가 나서야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해 설명해 달라.

한국 노동시장은 높은 임금에 고용안정에 기업복지가 풍부하고 노조와 정치의 보호도 받는 대기업·공공부문 등의 ‘1차 노동’과 낮은 임금에 고용불안정에 기업복지가 취약하고 노조와 정치에서 소외된 비정규·중소·하청·플랫폼·프리랜서 등의 ‘2차 노동’으로 분절됐다. 2차 노동시장에 입사해서 1차 노동시장으로 옮기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노동계급 내에서 계층 사다리가 끊어져 버렸다.

●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2022년도 12월 세전 기준 통계청의 ‘기업 규모별 평균소득 현황’(연봉)을 분석해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30년간 일한 노동자의 총 누적 임금격차가 13억원이었다. 30대 10년간 3억600만원, 40대 4억7520만원, 50대 5억4240만원으로 30년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연봉 차이다. 자산소득이나 다양한 기업 복지는 빠진 거다.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한채 값 이상 차이가 난다. 1차 노동의 토끼뜀 임금인상과 2차 노동의 거북이걸음 경주가 30년 넘게 쌓이면서 발생한 문제다. 이런 상태에서 정규직이 수천만원의 성과급까지 챙기면 그 주변 하청과 비정규직은 무지하게 속상해 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1대 99의 불평등보다 10대 90 불평등이 사회를 더 힘들게 한다. 최상위 1%는 내 옆에 없어서 잘 느끼지 못하는 구조의 불평등이고 10대 90은 바로 옆에서 비교되는 일상의 불평등이다. 이중구조 때문에 아이들은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극심한 교육경쟁으로 내몰린다. 다수 청년은 2차 노동시장을 기피한 채 그냥 쉬고 있으며 결혼과 출산율 저하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1차 노동시장은 줄어들고 2차 노동시장은 늘어난다. 1차 노동시장 노동자의 자식 90%도 2차 노동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자식들이 이 저주를 떠안게 된 것이다.

●우리사회가 20여년간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제기했지만 더욱 확대되고 있다.

첫번째 이유는 지금의 노동시장은 노동대 자본 구도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중·다층 구조다. 전통적인 노사갈등, 정규직·비정규직 또는 원청·하청 노동자의 노노 갈등, 대·중소기업 또는 원·하청 기업의 사사 갈등, 최저임금 노동자와 영세소상공인의 을들의 갈등, 청년과 장년 노동자 또는 직무급이냐 호봉급이냐로 드러나는 세대 갈등, 생산자·유통자·소비자 간의 이해 갈등 등 더욱 심화되고 복잡해졌다. 어느 하나만으로 접근해서는 풀 수 없다.

두번째는 이 문제를 앞장서 제기하는 것이 노동운동인데 그 주력이 1차 노동시장의 조직노동이다. 조직노동이 자신의 이해를 중심으로 노조를 하다 보니 노동운동은 지불능력 및 근로기준법 바깥의 2차 노동을 소홀히 하고 노노간 갈등이 발생했을 때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평등과 연대를 본령으로 하는 노동운동의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세번째는 정치의 문제다. 보수는 소홀했고 진보는 외면했다. 국민의힘은 노동약자 프레임으로 이중구조 문제를 들고 나왔지만 친경영 성격을 띠는 데다 노조 주력과 갈등한 역사 때문에 노동문제에 소홀했다. 민주당과 진보정당은 노동에 적극적이긴 한데 표가 되는 조직노동 눈치를 보면서 1차 노동시장의 요구에만 과도하게 충실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만든 것은 재벌로 대변되는 자본과 정부의 책임이 큰데 지금에 와서 노동에 책임을 전가한다는 시각도 있다.

대한민국의 발전에는 노사정 각각의 공7과3이 있다. 이중구조는 각각의 과 30%가 뒤엉켜 만든 합작품이다. 정부는 수출위주 중화학공업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공이 있지만, 중소기업과 지불능력 바깥 산업을 배제하면서 이중구조를 심화시킨 과가 있다. 재벌 등 중심부 자본은 세계 경쟁력을 갖추며 선진국 진입에 앞장선 공이 있지만, 하청 후려치기 등을 통해 지불능력 바깥 주변부 노동과의 격차를 심화시킨 과가 있다. 노동운동은 저임금을 탈피한 공이 있지만, 기업별노조 체계 속에서의 기승전-임금인상에 매몰돼 임금을 사회적으로 조율하지 못한 채 ‘중심노동’대 ‘지불능력 및 근로기준법 바깥노동’의 소득격차를 심화시킨 과가 있다.

●재단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극심한 진영논리가 이중구조 개선의 발목을 잡고 있다. 노동약자 지원과 보호를 위한 법률(노동약자지원법)에 대한 노동계 일각의 반대가 그 사례다. 노동약자지원법은 시혜적인 지원에 그쳐 본질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며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과 일하는 사람 기본법 제정으로 맞섰다. 하지만 각 법안은 대상의 층위가 다른 것이다. 노란봉투법의 대상은 잘 나가는 원청을 둔 하청노동자들이고, 일하는 사람 기본법은 사업계약을 맺고 소득세 3.3%를 내는 노동자들이다. 두 법이 적용되더라도 노동약자지원법을 필요로 하는 범주는 따로 있다. 노동약자지원법은 현 노동법 체계의 보호 범위에 들어올 수 없지만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이들을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것으로 공제회 등 상호부조 활성화 지원, 법적 분쟁 발생 시 상담·조정 지원, 표준계약서 마련 등이 담겼다. 그동안 노동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내용인데 동일한 선상에 놓고 우선순위나 경중을 매기고 있다. 진영논리로 밖에 설명이 안된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자는 의미다.

●노사 리더십이 부족하지 않나.

경영계가 이중구조 개선을 위해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하면 이득이 있겠다는 유인 요건을 줘야 한다. 재벌과 대기업이 경영권과 소유권을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상속세를 없애든지 인하 등을 제시할 수 있다. 지금의 여야 상속세 인하 경쟁이나 정년연장 등을 독립된 사안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대타협의 영역으로 가져와서 원·하청, 대·중소기업 상생 등 이중구조 개선과 묶어서 대타협을 이끌어야 한다.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도 하후상박 임금인상을 감내하면 국민연금을 더 받을 수 있게 하든지 인센티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기존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있다.

30여년 켜켜이 쌓이고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기존 경사노위에서 하듯이 몇개월 또는 1년 논의해서는 어림도 없는 문제다. 5년 10년 내다보면서 그리고 20년 이후의 대한민국을 고민하면서 독립된 기구로 구성해야 한다. 또 다층적인 갈등이나 이해구조를 갖고 있는 대상 모두가 참여하는 논의체여야 한다. 기존 노사정은 물론 5인 미만 노동자, 플랫폼 노사, 프리랜서 노사, 심지어 소비자 대표자들로 폭넓게 구성해야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원·하청,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대전환, 고용정책, 임금체계 등을 담아야 하고 꼭 대타협을 해야 한다 이전에 사회적 논의부터 해나가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영국이 가야 할 복지국가의 토대가 된 ‘베버리지 보고서’나 디지털 시대의 ‘좋은 노동’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 독일의 ‘노동 4.0 백서’ 같은 ‘대한민국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독립된 기구로 한국판 ‘산업·노동4.0 위원회’를 만들어 합의된 것은 합의된 대로, 쟁점이 있으면 있는 대로, 논란이 됐으면 논란대로 보고서에 담고 그것에 대해 국민들이 판단하고 필요할 때 꺼내서 계속 숙의할 수 있는 보고서여야 한다. 그 이후 사회적 대타협 과정을 거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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