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법정에 나타난 메모지에 다시 소환된 6공 비자금 ②

경제활동 없던 김옥숙씨, 현금성 자산만 200억원대

2025-03-26 13:00:01 게재

법원 제출 메모에 노 전 대통령 측근 줄줄이 거론

2005년부터 여러차례 ‘안방 비자금’ 논란 일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으로 촉발된 6공 비자금 논란이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를 향하고 있다. 항소심 과정에서 등장한 김 여사의 메모가 명백한 비자금 증거라는 주장에 따른 것이다. 특히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노 전 대통령의 범죄수익을 환수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번지고 있다.

26일 시민사회단체들에 따르면 5·18기념재단과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환수추진위원회 등이 잇달아 김 여사와 자녀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지난 1997년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관련 대법원 선고 이후 사라졌던 비자금을 김 여사 등이 은닉, 관리했다며 그 실체를 밝혀 달라는 것이다.

◆사라진 ‘노태우 비자금’ 장부 4권 = 지난 1995년 검찰 수사가 턱밑으로 다가오자 고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통해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원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약 1700억원이 남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정작 수사과정에서는 기업체가 제공한 비자금 규모를 3400억~3500억원대라고 진술했다. 최소한 1000억원 가까운 돈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비자금이 꼬리를 감출 수 있었던 주요 이유로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모르쇠’를 지목한다.

1995년 12월 18일 부정축재사건 1차 공판에서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에서 밝히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 하나를 털어놨다. 대통령 재직기간 기업인 등에게서 받은 비자금의 입·출금 내역을 기록한 장부가 있었으나 비자금 조성 사실이 폭로되자 파기했다는 것이다.

검찰측 직접신문에서 그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비자금 계좌를 폭로한 직후 이를 관리해온 이현우씨(전 청와대경호실장)와 상의해 장부를 파기했다”고 진술했다.

이 전 실장도 공판에서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초부터 기업체 등으로부터 돈을 받은 내역을 기록하도록 장부 작성을 지시했다”면서 “퇴임 이후까지 모두 4권의 장부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전 실장은 장부를 검은색 서류가방에 담아 노씨 집에 보관해왔으며, 박 전 의원의 폭로 다음날 연희동 사저에서 노 전 대통령과 통장내역을 확인한 뒤 장부를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 실장은 “장부를 뜯어서 비서실에 있는 쇄절기로 파기하려 했는데 고장나는 바람에 2층 사무실의 쇄절기로 파기했다”고 말했다. 파기는 노씨가 직접했고 자신은 응접실에 남아있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밝혔다.

여기에 퇴임 직전 비자금 은닉을 위한 노 전 대통령측의 노력도 한몫을 했다.

실제로 검찰은 1995년 중간 수사 발표에서 “자금은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에 가명 또는 차명 예금계좌에 예치해 두거나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CD)를 매입함으로써 자금의 출처나 소유관계를 철저히 은폐했다”며 “양도성예금증서는 1988년 8월부터 1992년 9월 사이에 21회에 걸쳐 총 1183억원 상당을 매입한 후 1992년 12월부터 1993년 2월 사이에 무기명으로 집중 매각해 시중은행에 6개의 계좌를 개설, 분산 예치했다”고 공개했다.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듯한 장면이다.

◆김 여사 메모지는 비자금 간이 장부 = 사라진 노태우 비자금은 지난해 이혼소송 과정에서 2건의 메모지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상 간이 비자금 장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메모지는 김 여사가 1998년 4월과 이듬해 2월 자필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노 관장은 이를 이혼소송에서 증거로 제출했다. 노 관장이 제출한 첫 번째 메모에는 ‘1998년 4월 1일 현재 최 실장 2억, 노재우 251억+90억, 선경 300억, 최 상무 32억, 정해창 30억, 이병기 52억. 맡긴 돈 667억+90억’이라고 기재됐다.

메모 속 최 실장은 최석립 전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추정된다. 육군사관학교 19기인 최 전 실장은 하나회 소속으로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 작전에 가담한 인물이다. 그는 1990년 소장으로 예편한 후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차장과 경호실장을 역임했다.

노재우씨는 노 전 대통령의 동생이며 최 상무는 최태원 SK회장을 말한다. 이병기는 청와대 전 의전비서관, 정해창은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으로 보인다.

1999년 2월 12일 현재라고 적힌 또 다른 메모에는 ‘노 회장 150억, 신 회장 100억, 선경 300억, 이병기 52억, 최서방 32억, 정실장 30억, 최석립 2억. 총 686억’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메모 속 신 회장은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의 옛 사돈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으로 보인다. 1990년 고인의 장녀 정화씨가 노 전 대통령 장남 재헌씨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2012년 이혼했다. 이 외에 노 회장은 노재우씨, 최서방은 최태원 SK회장, 정실장은 정해창 전 비서실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모가 공개되자 지난해 9월 19일 이희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대표(헌정회 미래전략특별위원회 위원장)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김 여사와 자녀들은 물론 노재우씨, 최태원 회장, 이병기·최석립·정해창씨 등을 범죄수익은닉 및 조세포탈 혐의로 고발했다.

이 대표는 “부정 축재와 은닉 자금을 환수해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로 고발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어 10월 14일에는 5·18기념재단이 노 전 대통령 일가가 은닉한 비자금이 1266억원대로 추정된다며 김 여사와 노 관장 등을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1995년, 가족·친인척 수사 없어 = 법원은 이들 메모를 김 여사가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을 기재한 것이라는 판단했다. 메모 속 인물들 대부분이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라 비자금 가능성이 높다. 특히 메모 속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현금성 자산이다. 김 여사의 1999년 메모에는 은행 61억원, 금고 10억1000만원, 채권 84억4000만원 등 총 218억5000만원의 현금성 자산이 기록됐다.

특별한 경제 활동을 하지 않은 김 여사가 이처럼 많은 현금성 자산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김 여사 자신의 능력에 의한 자산이라기보다는 은닉 비자금의 일부이거나 별도로 조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검찰은 1995년 비자금 수사 당시 자택 압수수색이나 가족 수사를 하지 않았다. 당시 민주당 비자금 진상조사위원이던 고 강창성 전 의원은 “김옥숙 여사의 친인척이 관리하는 것(비자금)은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면서 “김 여사가 비자금 2000억원을 별도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친인척들과 비자금 반환 소송전 = 김 여사가 관리하는 비자금, 이른바 ‘안방 비자금’을 둘러싼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2005년 대검 중앙수사부는 약 12억원이 입금된 김 여사 명의 예금계좌 2개를 발견해 추징했다. 김 여사는 가족이 별도로 관리해오던 돈이라고 해명했지만 검찰은 비자금으로 추정했다. 김 여사는 친인척과 비자금을 돌려 달라는 소송전에 등판하기도 했다.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동생 재우씨와 조카 호준씨를 상대로 “비자금으로 설립한 회사를 돌려달라”고 낸 소송에서 김 여사가 직접 증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내가 맡긴 120억원으로 동생이 냉장회사(오로라CS)를 설립했으니 내가 회사 소유주”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노재우씨측에서 연희동자택 별채 부지, 대구 팔공보성아파트 등 부동산과 차명계좌를 폭로하는 등 이전투구 양상을 띠었다. 사실상 노씨 일가가 비자금의 존재를 공개한 것이지만 더 이상의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노씨 일가는 2013년 검찰에 “친인척에게 차명으로 맡긴 비자금을 국가가 환수해주면 미납 추징금 231억원을 모두 납부하겠다”며 탄원서를 내고 김 여사가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당시 노재우씨측은 ‘김 여사가 소송전을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2021년까지 아들 노재헌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센터로 기부된 147억원, 노 관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노태우센터로 2023년 출연된 5억원 등도 이른바 안방 비자금으로 의심받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 노 전 대통령 가족들은 김 여사의 이른바 ‘안방 비자금’ 논란에 아직까지 말을 아끼고 있다.

‘노태우 비자금’과 관련해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아 검찰에 고발된 노 관장은 지난 19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개최한 ‘제3회 서울예술상’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했다.

이날 노 관장은 최 회장과 이혼 소송 과정에서 등장한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 메모로 사인간의 이혼 소송이 여러 사회적 해석을 낳고 있다는 한 기자의 질문에 “(지금은) 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곧 시간이 올 것”이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출처 확인이 어려운 규모의 돈이 유입된 것을 묻는 질문에는 “그러게요”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다만 노 관장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며 “곧 의견을 내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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