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대개조를 시작한다 ① 정세균 전 국무총리
“입법·사법·행정 ‘총체적 위기’…권력화 팬덤, 정치인 부리려 해”
미래 투자 등 기업 리더십도 부재, 잠재성장률 저하 부추겨
팬덤에 맛들인 정치인, 국가·정당보다 개인 이익 우선시해
사회적 대타협, 당장 성과 기대 말고 끈기 있게 추진 해야
조기대선이후 ‘정당·대통령’ 아닌 ‘국민’ 승리의 길 찾아야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진단했다. 정 전 총리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모두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데다 민간 기업들 역시 리더십 부재로 미래 투자를 등한시해 결국 국가경쟁력이 추락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그는 정치의 양극화와 팬덤 정치가 사회 각 분야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치료책도 결국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과거의 팬덤과 달리 최근에 나타나는 팬덤은 스스로 권력화해 정치인을 쥐락펴락하고 정치인들은 이러한 팬덤을 등에 업고 과격한 발언과 행동을 쏟아낸다는 점을 우려했다. 철학과 소신이 부족한 정치인이 팬덤과 보조를 맞춰 국가, 정당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진영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도 숨기지 않았다.
정 전 총리는 주요 해법으로 ‘사회적 대화’를 제시했다. 그는 사회적 대화의 전제조건을 강조했다. “당장 성과를 내려고 집착을 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꾸준히 해야 한다”는 거다.
스스로 ‘개헌론자’라고 밝힌 그는 개헌 성공 방정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대통령, 당대표 등이 간섭하지 말고 국회 정치특위에 맡기라는 거다. 또 조기 대선 이후 집권 세력이 정당이나 대통령 개인의 승리가 아닌 국민의 승리 기준을 따라 집권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내일신문은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정 전 총리를 만나 우리나라 상황을 점검하고 ‘국가 대개조’ 방향을 들었다.

정 전 총리는 고려대 법대를 나와 쌍용그룹에서 실물 경제에 몸을 담근 후 정계에 입문했다. 전북 진안군무주군장수군임실군에서 4선을 거쳐 서울 종로에 도전, 두 번을 성공해 국회의원 6선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 의장, 원내대표, 당의장에 이어 민주당 대표, 국회의장을 역임했고 노무현정부에서 산업부장관, 문재인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일했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깊이 있게 두루 거친 인사로 꼽힌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나.
한마디로 총체적 위기다. 피크이거나 피크를 지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다. 선진국 진입 초입으로 선진국의 이점을 향유하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상황인 것 같다.
●어떤 부분이 가장 큰 위기인가.
입법부는 전쟁을 하고 있다. 행정부는 8년 만에 대통령이 둘이나 탄핵을 당했다. 고위직 공무원들은 복지부동한다. 사법부는 여기 판결 다르고 저기 판결 다르다. 마땅히 판결을 해야 될 것도 계속 뒤로 미루면서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한 상황이다. 입법 행정 사법이 모두 제 기능을 잃고 있다.
비정상화된 정치가 사회 여러 부문에 악영향을 미치고 다른 분야까지 비정상으로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에 정치부터 제자리로 가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률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리더십 부재다. 실기를 많이 했다. 정치 리더십, 행정 리더십 그리고 기업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AI, 반도체 등 미래 신기술 분야는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고 국가 대항전이다. 기업이 알아서 잘 하라고 해선 안 된다. 특히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 리더십이 발휘해줘야 된다. 그게 전혀 안 된 거다. 기업 리더십의 실종 역시 우리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멈춰 세웠다.
●정치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양당제 고착화다. 선택의 폭이 좁다. 팬덤 정치도 문제다. 지금의 팬덤은 권력화 됐다. 팬덤이 정치인을 부리려고 한다. 소신 없는 정치인들은 그것만 쳐다보고 정책을 만들고 의사결정을 한다. 철학과 소신이 부족하고 양심이 없다 보니 진영으로 나뉘어 편싸움만 하는 전쟁터로 변한 상황이다.
정치인의 덕목은 먼저 국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다음에 정당의 이해관계, 마지막이 정치인 개인의 이해관계다. 그런데 팬덤 정치에 맛을 들인 정치인들은 그 순서가 거꾸로다. 자기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면서 팬덤과 보조를 맞춘다. 팬덤이 드라이브 하는 대로 가다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이익이 훼손되기도 한다.
●트럼프 2.0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구세대는 대한민국이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언더독(패자, 약자)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미국, 강대국 하면 꼼짝 못한다. 하지만 신세대들은 그렇지 않다. 미국과 협상할 때 이 젊은이 마인드를 가지고 해야 된다. 뱃심 있게 한 판 붙기도 하고 그래야지, 미리부터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결국은 진다. 설령 질 망정 패배주의를 가지고 시작하면 안 된다. 너무 조급하게, 그냥 쉽게 항복하는 협상은 절대 안 된다.
이해관계도 중요하지만 옳고 그름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 트럼프 정부는 세계 지식인들이 볼때 온당하지 않다. 옳지 않은 것은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된다. 옛날과 같이 전적으로 미국에만 의존하던 시대에서 벗어나야 된다. 맞장 뜰 수 있는 뱃심이 필요하다.
●불신이 팽배해졌다. 중요한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
신뢰가 위기를 맞고 있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다. 정치부터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게 굉장히 심하다. 정치 불신이 다른 분야로까지 전이돼 불신사회를 만들고 있지 않나.
그래서 정치의 정상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에 이르고 그 합의는 존중되는, 그럼으로 신뢰를 쌓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
이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 의사, 법조인, 고위 관료 등 기득권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마인드를 가질 수는 없을까. 포용 사회를 만들려는 이들의 철학과 액션이 신뢰가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본다.
●대북 문제가 너무 도외시됐다.
지금 완전히 남북 간에는 대화가 단절돼 있는 상태다. 북한은 노골적으로 우리를 적대시하는 상황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보다 못하다. 우리는 대화 노력을 계속 해야 된다. 바이든 정부가 현상 유지 정책, 관여 자제 정책이었다면 트럼프는 남북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변화를 만들어 갈지도 모른다. 그 경우에도 우리가 당사자로서 절대 소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미, 대중, 대러 등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에 절대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더욱 노력해야 된다,
●계속된 개헌 요구와 시도에도 잘 안된 이유는 뭔가.
지도자들 특히 대통령 혹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의 철학 부재의 산물이다. 대권에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개헌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가 가까워지면 우선순위에서 뒤로 늦추며 ‘나까지 하고 그다음에 개헌하면 되지’하는 생각을 하지 않나 싶다.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이 뒤에서 리모트 컨트롤을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집착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국회에만 맡겨두면 (개헌이) 금방 된다. 여야가 정치 협상 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 ‘당신네들이 거기서 합의해 가지고 오라’로 하면 합의가 가능하다.
분권형 개헌이 꼭 이뤄져야 된다. 빠를수록 좋다. 대통령 선거는 지방선거와 함께 해야 된다. 총선과 같이 하면 항상 여대야소가 된다. 그러면 국회는 있으나 마나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하라는 얘기나 똑같다.
●대선 국면에서 어떻게 하면 개헌을 할 수 있을까.
대선 때 로드맵까지 제시해야 한다. 원칙론이 아니라 디테일한 로드맵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한다. 대선이 끝나면 바로 여야가 정치 협상을 하는 위원회를 만들어야 된다. 대통령이건 야당 대표건 여당 대표건 간에 뒷배들은 관여를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양심 있는 중진들로 위원회를 만들어서 진지하게 논의하고 가능하면 내년 지방선거 때 함께 국민투표하면 좋겠다.
●새 정부에서 성장 잠재력을 높이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되나.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는 사회적인 갈등을 완화하는 다양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인 대화, 사회적인 대타협이 중요하다. 노사 관계를 비롯한 사회적인 갈등을 최소화해서 성장 잠재력을 높일 수 있는 길이다. 사회적 대타협의 성공사례와 성공모델을 많이 만들어 전파하는 선순환의 노력이 있으면 잠재 성장률이 회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사회적 대타협 방법이 따로 있을까.
긴 호흡이 필요하다. 당장 성과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이건 꼭 해야 되겠다’는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노력하면 성과가 있을 텐데 당장 성과를 내려고 집착을 하다 보면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하지 못하게 된다. 스웨덴의 타게 에르난데르 전 총리는 ‘목요클럽’을 23년간 했다. 스웨덴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놨다. 지도자의 각성이 제일 중요하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자세로 하다가 나가야 된다.
부작용이 없도록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설익은 걸 막 일방통행으로 하려다가 문제를 일으켜 안 하니만 못한 사례가 생길 수 있다. ‘대화와 타협을 위해 여야가 협치를 했더니 양쪽에 다 유리하더라’는 사례들을 많이 만들면 그게 문화가 되는 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후 문재인정부가 적폐청산에 몰입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국민이 승리하는 기준으로 정부를 만들면 된다. 정당이 승리하거나 대통령이 승리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게 국민이 승리하는 길이냐, 그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판단하면 된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극복하는 데에 정치가 어떻게 하는 게 도움이 되겠냐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의사결정을 하면 괜찮은데 정략적인 데에 머물러 있으면 ‘시즌 2’가 될 것이다.
●소수정당이 얘기하는 공동정부나 연합정부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대중정부가 자민련과 DJP연합을 했다. 당시 정책위에서 활동해서 직접 경험을 했는데 완전히 색깔이 달라도 연정이 가능하다. 정치인들끼리 맡겨 놓으면 가능하다. 조율이 힘들지만 조금씩 양보하면 합의가 가능하다. 다만 팬덤 공격을 이겨내려면 소신이 필요하고 철학이 필요하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