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대법원 파기환송에 바닥 친 ‘사법신뢰’

2025-05-07 13:00:46 게재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간신히 유지해온 권위도 좀체 회복하기 어려워 보인다. 역대 정권에서, 특히 윤석열 정권에서 선택적 수사와 편의적 기소를 일삼아온 검찰에 대한 국민신뢰는 이미 회복불능의 만신창이 상태로 떨어진지 오래다. 하지만 재판을 담당해온 사법부는 그래도 우리사회에서 ‘존중해줘야 할 영역’으로 명맥을 유지해 온 게 사실이다. 그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것도 사법부 권위의 상징인 대법원이 자초했다.

대법원이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사건을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한데 대한 비판과 성토, 국민저항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과 9명의 대법관들이 다수의견으로 밀어붙인 판결 과정은 내규를 위반하고 이제까지 통용돼온 관례를 무시한 이례적 행위의 연속이어서 모두를 경악케 했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정치개입 민낯 드러내

항소심 37일 만에 소부에 배당한 지 2시간 만에 대법원장 직권으로 전원합의체로 회부해 겨우 두번의 심의를 한 뒤 9일 만의 파기환송 판결이다. 1심의 유죄판결이 2심에서 무죄로 뒤바뀐 첨예한 사안에 내달 3일 치러지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는 가장 유력한 대통령 선거 후보의 피선거권을 박탈할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이렇듯 졸속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하다.

대법관들이 7만쪽에 달하는 소송기록을 제대로 훑어보기는 한 것인지, 대법관별로 전자문서를 로그해 열람한 증거가 있는지 공개하라는 국민청원에 폭발적인 호응이 쏟아진 것도 이런 까닭일 터이다.

고등법원으로 환송된 뒤에도 당일로 재판날짜를 잡는 등 시간에 쫓기듯 초스피드로 진행되는 재판일정에 의구심은 깊어만 간다. 가능한 가장 이른 시일 안에 재판을 끝내서 대법원에 되돌려 보내 기대를 충족시키겠다는 것 아닌가.

대법원이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7일간의 상고 제기기간은 지키되 상고이유서 제출기한으로 부여된 20일 규정은 지키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하는 ‘음모론’이 그럴싸하게 나돈다. 평소라면 일소에 부칠 음모론이 힘을 얻는 것은 사법부의 이해하기 힘든 비상식적 행태와 함께 혹시라도 비난을 무릅쓰고 결정해 밀어붙이면 되돌릴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 진행되면 10여명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대법관들이 대통령을 선출할 국민의 주권을 송두리째 가로채서 막아버리는 일이 실제 벌어질 수 있다.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책무를 맡은 한덕수 권한대행이 ‘선수’로 출전하는 반칙을 범했듯이 조희대 대법원장이 공정한 심판역이 아니라 경기결과를 좌우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사법쿠데타’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내란 직후 온 힘을 다해 계엄군의 국회침탈을 막아내며 계엄해제결의안을 가결하고,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결정을 공표하기까지 가슴 졸이며 지내온 숱한 불면의 시간들. 지귀연 판사의 황당무계한 윤석열 구속취소 조치와 심우정 검찰총장의 즉시항고 포기, ‘내란수괴’가 버젓이 풀려나는 해괴한 일을 겪으면서도 끝내 주권행사를 코앞에 두고 있는데 마지막 관문에서 사법부의 선거개입이 의심되는 행태를 보고 있자니 불안감과 분노가 중첩 표출되는 것이다.

대선 이후로 ‘재판 연기’가 순리

민주당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 만반의 대책을 마련해놓았다고 하지만 미덥지 못하다. 오죽하면 국민의힘 대선후보 김문수와 한덕수 전 총리의 후보단일화 과정보다도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완주할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이 쏠린다.

민주당은 대선 이후로 공판기일을 미뤄 달라 요구하면서 12일까지 답변을 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낸 상태다. 여차하면 고등법원 담당재판부와 대법원을 상대로 합법적으로 쓸 수 있는 ‘최후의 무기’인 탄핵소추도 불사하겠다고 압박한다. 자칫하면 ‘기호1번 후보’가 피선거권이 박탈돼 날아갈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달리 뾰족한 대응방안이 없어 보인다. ‘역풍’ 따위를 걱정할 계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브라질 대통령을 두번 지낸 뒤 퇴임했다가 정계에 복귀한 노동자출신 룰라 후보가 선거 도중 사법부의 ‘부정한 판결’로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됐다가 나중에 무혐의로 밝혀지고 세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극적 사례는 사법부의 정치권력화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실감케 한다. 룰라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잘 나가던 브라질 국격은 그새 ‘형편없는 3등국가’로 낙인찍히고 국민의 삶은 고통 속에 내팽개쳐졌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