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중동행은 국익? 가족 사업?
걸프 지역과의 초대형 투자 협상 … 가족 기업의 이해충돌 논란 확산

13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를 시작으로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를 잇따라 방문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각국 정상과 수조원 규모의 투자, 무기, 기술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가족과 측근들이 걸프 지역에서 이미 활발히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외교와 사적 이익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걸프 왕정이 최우선 파트너 = 인터넷매체 악시오스(Axios)는 13일 “트럼프의 모든 길은 걸프로 통한다”고 보도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첫 순방지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나 유럽 동맹국을 선택해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두 차례 모두 사우디아라비아를 택했다. 이번에도 교황 프란치스코 장례식을 제외하면 걸프 지역이 사실상 첫 방문지였다.
인공지능, 무기, 에너지, 항공기 등 초대형 계약을 중심으로 한 이번 순방은 전통적인 외교보다는 사업 중심의 접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는 사우디가 후원하는 LIV 골프 대회를 자신의 리조트에서 개최했고, 사위 재러드 쿠슈너는 사우디 국부펀드(PIF)로부터 20억달러(2조8000여억원)를 유치했다.
트럼프 오거니제이션은 두바이와 도하 등지에서 고급 부동산 개발을 추진 중이다. 카타르 정부와는 트럼프 브랜드 골프장과 해변 빌라 프로젝트를 협의하고 있다. 또 트럼프 가문이 소유한 암호화폐 회사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은 UAE 국부펀드 MGX로부터 20억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악시오스와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순방을 통해 최대 1조달러 규모의 거래를 유치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는 “사우디에서 1기 때 4500억 달러를 유치했지만 이번에는 1조달러를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우디는 6000억달러, UAE는 1조4000억달러, 카타르는 항공기와 드론, 광물 자원 계약을 포함한 3000억달러 규모의 협정을 예고했다.
다만 이들 계약이 실제로 모두 이행될지는 불확실하다. 대부분 수년간 분산되거나 조건부로 체결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자신의 협상력 성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걸프 국가들과의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기반으로 협상을 주도하고 있으며, 인권이나 민주주의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방식으로 환대를 받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패밀리 전례 없는 사업 확장 = 월스트리트저널(WSJ), 뉴스위크, 쿼츠 등 주요 매체는 트럼프 대통령의 가족들이 걸프 국가들과의 사업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오거니제이션은 다르 글로벌(Dar Global)과 협력해 제다, 두바이, 무스카트, 도하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부동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에릭 트럼프와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주요 계약 발표 행사에 참석하고 있으며, 암호화폐 기업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의 경영에도 직접 관여하고 있다.
이 회사는 스테이블코인 ‘USD1’을 발행했으며, 이를 통해 UAE의 MGX 펀드가 20억달러를 바이낸스에 투자했다. 해당 코인은 트럼프 가문 소유 법인이 발행했고, 수익의 상당 부분이 가족에게 귀속되는 구조다. ‘쿼츠’는 이를 두고 “공적 권위를 사적 수익 모델로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항공기 선물과 위헌논란 = 카타르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4억달러(5600여억원) 상당의 보잉 747-8 항공기를 선물하려는 계획은 이번 순방의 윤리적 쟁점을 더욱 부각시켰다.
이 항공기는 에어포스 원 임시 대체기로 사용된 후, 대통령 도서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백악관과 국방부는 “항공기는 정부 소유로 간주되며, 개인 이익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헌법의 보수 조항(Emoluments Clause)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컬럼비아대학교 리처드 브리폴트 교수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항공기는 트럼프 개인 도서관에 귀속되므로, 이는 미국 정부에 대한 선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선물은 대통령에게 호의를 유도하는 수단이며, 그 대가는 무기 판매나 정책적 유화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시민책임윤리감시단체(CREW) 역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사업 구조와 이해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가족 기업의 확장은 대통령직의 그림자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이 항공기가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적 뇌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도했고, 프랑스 ‘르몽드’는 이 거래가 암호화폐 플랫폼과 결합될 경우 미국 외교에 외부 영향이 개입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걸프 국가는 과거에도 미국의 핵심 동맹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 관계를 ‘비즈니스 중심’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사우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을 추진했고, 이란과의 핵 협상 중재에도 걸프 국가들을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오바마와 바이든 정부가 카타르, UAE를 통해 인질 석방과 가자지구 중재를 시도했던 외교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트럼프의 방식에는 가족 기업의 사업 이해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카타르를 “하마스와 협상한 국가”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수조원대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친이스라엘 성향의 공화당 지지층 내부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처럼 트럼프의 이번 중동 순방은 미국 대통령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사적 이해를 어떻게 끌어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대통령직과 가족 사업의 경계가 불투명해질수록 미국 외교 정책의 신뢰 역시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