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전력망 안전성 확보가 선결과제다
전기가 없으면 석기시대로 되돌아간다. 지난달 말께 스페인 등 이베리아 반도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 전기 없이는 옴짝달싹 못하는 초연결 사회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세상이 암흑천지로 변한 건 물론이고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고 카드 결제가 불가능했으며 인공호흡기 중단 등 의료 시스템이 먹통이 됐다. 승강기에 갇힌 사람은 구조 요청도 할 수 없어 구조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도로도 자동차와 사람이 얽혀 아수라장이 됐다.
한국의 전력망은 스페인보다 취약해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스페인을 비롯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주요국은 전력이 부족하게 되면 국가 간 전력 거래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력을 수입하고 남으면 이웃 국가로 수출한다. 그러나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외부에서 전력을 받거나 보낼 수 없다.
15년 뒤엔 우리나라도 ‘전력 부족 국가’될 가능성 높아
우리나라에서도 정전이 종종 발생한다. 지난 3월 경북 일대 대형산불로 안동 영덕변전소 주변 등 여러 지역에서 정전이 발생했다. 2006년에는 배의 닻이 해저 송전 케이블을 건드려 전력 상당량을 육지에 의존하는 제주도 전체가 2시간 반 동안 마비되는 등 크고 작은 정전 사태가 잇달았다.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하는 정전을 100% 막는 방법은 없다. 앞으로 전력 먹는 하마인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증가 등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해 15년 뒤엔 우리나라가 ‘전력 부족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전력 부족 국가를 면하려면 발전소를 많이 지어야 한다. 하지만 발전소만 세운다고 전력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공급량이 넘쳐도 이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없다면 오히려 전력망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수도권 전력 수요가 전국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지방에서 생산된 전력을 대거 수도권으로 끌어와야 한다. 그러나 송전망 병목현상 등으로 제대로 가동을 못 하는 동해안 발전소들이 많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설비가 집중된 전라남도 등 서남해안에서도 발전용량 과잉으로 2031년까지 추가 설비 진입이 어렵다.
충남 당진시 송악읍과 아산시 탕정면을 잇는 45㎞ 송전선로가 지난 2일 준공됐다. 선로 사업 시작 후 꼬박 21년여가 걸렸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아산 탕정의 세계 최대 디스플레이 단지로 보내기 위해 2003년부터 추진된 이 선로는 당초 2012년 준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주민 반발과 철새 영향, 서해대교 경관 훼손 등의 이유로 준공 시기가 여섯 차례나 연기돼 준공이 12년 이상 지연됐다. 이 과정에서 노선 변경만 일곱 번이 있었고 결국 육지 대신 갯벌에 송전선 공사를 해야 했다.
지각 준공으로 태안 화전은 용량보다 전기를 적게 생산할 수밖에 없었고, 수도권의 모자라는 전기는 값비싼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으로 충당됐다. 한국전력은 이로 인해 1조2000억원의 손실을 보게 됐고 이 손실은 고스란히 전기요금에 반영됐다. 한전은 2020년 12월 이후 산업용 전기요금을 여덟 차례 70% 넘게 올렸다.
이로 인해 한국의 상업용 전기요금이 미국이나 중국보다 비싸져 가격 경쟁력을 상실, 불 꺼지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공사가 지연된 송전선로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계획된 송전선로 사업 31개 중 정상적으로 준공된 사례는 현재까지 5건에 불과하다. 60개월 이상 장기 지연된 사업도 5개에 이른다.
전력망 안정성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앞서야
중국산 태양광 인버터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통신장치가 발견되고 국내 상업용 에너지 저장장치(ESS) 다수가 관리 소홀로 가동률이 20~30%에 불과, 폐기 직전이라는 점도 문제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5월 “미국 전력망에 물려 있는 일부 중국산 태양광 인버터에서 악성 통신장치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인버터는 태양전지에서 나온 직류(DC)를 교류(AC)로 변환해 전기를 내보내는 장치로, 풍력발전기 등에도 장착된다. 해커가 악성 통신 장치를 통해 송전 시스템을 마비시키면 대정전 등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인버터는 95%가 중국산이라고 한다.
6.3 대선주자들은 최근 열린 합동 토론회에서 원전과 재생에너지 비중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전력망 안정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앞서야 하겠다.
박현채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