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미술은 개인 자유와 감성의 시각예술이었다

2025-05-29 15:18:26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10)

필자는 지난해 여름 ‘나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매너리즘 미술에 이어 17~18세기 바로크, 로코코 미술을 살펴보았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은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으며,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구교국가이면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 대항해시대 해상강국인 스페인, 절대왕정 국가인 프랑스, 신교국가이면서 신흥 해상강국인 네덜란드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교황, 국왕, 귀족, 시민 계급 중심의 미술을 구현했다.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제 18~19세기 2개의 대혁명인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은 유럽의 총체적인 변화를 불러왔고, 이 시기에 나타난 3개의 미술사조인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는 이성, 감성, 현실이라는 본질을 강조하면서 근대미술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이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에 걸쳐 나타난 낭만주의 미술을 살펴본다.

낭만주의 미술은 ‘이성과 질서’ 중심의 신고전주의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자유와 감성’ 중심의 미술사조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점은 미술에서의 낭만주의와 일상에서의 낭만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낭만은 흔히 감상적이고 달콤한 의미로 쓰이지만 낭만주의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비극적인 의미도 포괄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낭만주의는 단순히 낭만 + 이즘(~ism)이 아니다. 프랑스대혁명, 나폴레옹전쟁, 산업혁명 등의 격동기에 나타난 유럽 사회의 분위기나 정서를 반영하는 역사적, 철학적, 예술적 개념이다. 그래서 낭만주의 미술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낭만이 한 줄의 시라면 낭만주의는 그 시를 둘러싼 하나의 예술운동이자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서 나타난 문학적, 예술적, 사상적 흐름이 바로 낭만주의 사조였으며 낭만주의 미술은 자유와 감성을 형상화한 시각예술이었다. 그러나 근대사회 격변기는 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 미술이 연이어 나타났기에 그 생명력은 길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은 유럽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놓았지만 미술사조의 급격한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은 곧 신고전주의 미술의 퇴조로 이어졌고 산업혁명의 도시화, 기계화는 곧 인간의 소외, 자연의 파괴에 대한 반동으로 낭만주의 미술을 불러오게 되었다.

낭만주의 미술은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꽃피워

그렇다면 프랑스, 영국, 독일 낭만주의 미술의 배경과 특징은 어떠한가? 사실 당시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낭만주의 미술인지 알지 못했다. 문학, 철학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낭만주의 경향성이 음악, 미술에 영향을 미치면서 19세기 후반 이후에 낭만주의 미술로 명명된 것이다. 낭만주의 미술은 이름보다 감성이 먼저였던 사조였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달랐다. 프랑스의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는 프랑스대혁명 이래 나폴레옹 제정기, 부르봉왕조 복고기까지 억눌려 왔던 민중의 자유와 감정을 ‘사건’으로, 영국의 터너와 컨스터블은 산업혁명에 대한 감정적 반작용을 ‘자연’으로, 독일의 프리드리히는 문학과 철학이 드러낸 인간 내면의 감정을 ‘풍경’으로 시각화한 것이었다.

이렇게 낭만주의 미술은 단순한 미술 양식이라기보다는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변동의 거대한 물결 속에 나타난 ‘시대정신’이었으며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자유 정신’이었다. 그렇기에 낭만주의 미술은 정치, 경제, 사회, 철학적 격변기의 중심에 있었던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꽃피웠으며, 이성보다는 감성, 질서보다는 자유, 국가보다는 개인을 강조한 미술을 추구하였다. 이전과 달리 인간 내면의 감정, 저항과 자유의 정신, 자연의 숭고함과 경외감, 비극적이거나 숭고한 사건 등이 미술의 대상이 되었으며 극적인 구도, 빛과 어둠의 대비. 이국적 분위기, 오리엔탈리즘, 역동성 등은 낭만주의 미술의 특징이며, 감상 포인트가 된다.

낭만주의 미술은 유럽 사회 격동기에 분출된 감성의 미학

필자는 지난해 여름 6월 11일부터 8월 18일 사이 각각 다른 시기에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영국의 내셔널갤러리, 독일의 알테 내셔널갤러리, 드레스덴, 함부르크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낭만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낭만주의 미술은 회화가 중심이었다. 미술관 대부분은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미술을 연계 전시하고 있어 두 시기 명작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다. ‘이성의 미학’인 신고전주의 미술과 유럽 사회 격동기에 분출된 ‘감성의 미학’인 낭만주의 미술은 확연히 달랐다. 전자가 ‘국가와 권력’ 중심의 미술이었다면 후자는 ‘개인과 감성’ 중심의 미술이었다. 드레스덴 미술관은 소장품의 질이 높을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북유럽 바로크-고전주의-낭만주의 미술사 순서대로 작품을 전시하고 해설패널이 일목요연해서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유럽의 그 어느 미술관보다도 큐레이션 철학이 관람자 친화적이라 매우 인상적이었다.

낭만주의 미술을 감상하면서 미술은 ‘시대의 거울’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미술사조의 작용- 반작용은 인간의 심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유도 해보게 되었다. 인간의 심리는 결핍과 과잉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결핍에서 태어나 과잉을 탐하다가 권태에 이르면 새로운 감정이나 표현형식을 갈망한다. 정-반-합으로 순환하는 헤겔의 변증법처럼 고전미술–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발전해 온 미술사도 인간의 그와 같은 심리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 미술관은 그저 ‘보는 공간’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생각하고, 느끼고, 사유하는 공간’인 것이다. 독자들도 유럽 여행을 가시면 힐링도 할 겸 미술관 1~2곳은 방문해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권한다.

‘메두사호의 뗏목’은 프랑스 자유 정신의 선언

메두사호의 뗏목(그림1)
메두사호의 뗏목(그림1)

이제 낭만주의 명작들을 살펴본다. 우선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는 테오도르 제리코와 외젠 들라크루아다. 두 거장은 모두 실제 사건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제리코의 대표작은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메두사호의 뗏목(1819)’이다(그림1). 그림은 실제 뗏목 크기의 대작(716 x 491cm)이다. 1816년 프랑스해군 소속의 메두사호가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난파되자 항해 경험이 전혀 없는 귀족 출신의 선장과 장교 등은 6정의 구명정으로 탈출하고 뗏목에 남겨진 149명은 13일간의 표류 끝에 15명만 살아남은 사건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당시는 나폴레옹 실각 후 부르봉왕조 복고기(루이 18세)로서 복고 왕정의 침몰을 상징할 정도로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제리코는 생존자의 증언과 실사 등을 토대로 사회적으로 고발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눈으로 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을 ‘가슴으로 느끼게’ 표현한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시체와 엉겨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생존자의 표정과 역동적인 모습은 감정이입을 느끼게 한다. 삼각형 구도, 빛과 어둠의 대비, 고통, 절망, 공포, 희망, 용기 등 인간의 감정이 한 장면에 공존하는 표현은 낭만주의적 특성이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미술의 기념비적인 그림이지만 그림을 넘어 암울한 시대와 불평등한 사회를 향한 민중의 ‘저항정신’이면서 감정을 해방한 ‘자유 정신’의 선언이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 7월 혁명의 상징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그림2)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그림2)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을 정점에 올려놓은 거장이다. 그의 대표작은 제리코의 작품과 함께 루브르박물관의 같은 전시구역(드농 윙 1층)에 있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이다(그림2). 박물관 측이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작으로 사건(제리코)과 혁명(들라크루아)을 상징하는 그림을 함께 전시한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1830년 7월 샤를 10세의 언론탄압과 왕정 회귀 시도에 반발하여 파리시민들이 봉기한 혁명을 배경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중심인물은 자유의 여신 ‘마리안느’다. 그녀는 가슴을 드러낸 채 오른손에 삼색기(혁명기), 왼손에는 총검을 들고 있다. 이는 혁명을 위해 민중을 이끌며 함께 싸우는 여신을 상징한다. 그림 좌측의 노동자, 오른쪽의 중산층 청년 등은 다양한 계층의 민중이 참여하는 혁명 이미지를, 전경의 시민, 병사, 아이들의 시신은 혁명의 희생을 나타낸다. 삼각형 구도, 빛과 어둠의 대비, 인물들의 표정, 동세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감정, 이전의 역사화에는 없었던 민중의 주체화는 낭만주의적 특징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제정기, 부르봉왕조 복고기를 거치면서 억눌려 왔던 민중해방의 이상이 7월 혁명으로 폭발된 것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전함 테메레르’는 영국의 자부심이며 영국예술의 아이콘

영국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거장은 윌리엄 터너(1775~1851)와 존 컨스터블(1776~1837)이다. 터너는 빛과 색의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 자연의 숭고미(sublime beauty)를, 컨스터블은 농촌 풍경 속에서 이상적인 자연을 묘사하는데 탁월했다. 터너는 영국의 자부심이며 영국예술의 아이콘이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나 왕립미술원의 최연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젊었을 때부터 그림으로 부와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괴팍한 성격 탓인지 공식적으로 결혼생활은 하지 않았으며 제자나 후계자도 없이 말년에는 이름도 바꿔가면서 은둔생활을 해서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그는 주로 바다, 폭풍, 선박, 등 해양 풍경화를 많이 그렸으며 ‘눈보라 속의 증기선’, ‘전함 테메레르’, ‘비, 증기, 속도’ 등의 명작을 남겼다.

전함 테메레르(그림 3)
전함 테메레르(그림 3)

그 가운데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전함 테메레르(1838)’는 특별하다(그림 3). 이 그림은 1805년 트라팔가르해전에서 활약한 전함 테메레르가 수명을 다해 작은 증기 예인선에 끌려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는 영국해군의 영광이 산업혁명의 기술발전으로 소멸하는 냉혹한 시대의 전환을 말해준다. 황금빛의 노을은 과거의 영광이 사라지는 감정을, 검은색의 예인선은 산업기술의 차가운 감정을 나타낸다. 색채와 빛의 대비를 통해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암시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2005년 BBC가 주관한 설문조사에서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으로 선정되었으며 2020년에는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배경 그림으로 삽입되었다. 터너는 죽기 전에 “태양은 신이다(The Sun is God)”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자신이 ‘빛의 화가(Painter of Light)’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건초 수레’는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정수

건초 수레(그림 4)
건초 수레(그림 4)

다음은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컨스터블의 ‘건초 수레(1821)’다(그림 4). 컨스터블은 영국 서퍽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52세에 왕립예술원 회원이 되었을 정도로 대기만성한 화가였다. 그는 자연에 대한 접근방법이 터너와 달랐다. 터너의 그림이 빛 속에 자연을 용해하고 세부를 생략한 광시곡이었다면 컨스터블의 그림은 자연 그대로 세부를 살려 그린 전원교향곡이었다. 이렇게 컨스터블은 자연을 진실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평생 풍경화를 그려서 ‘하늘을 그린 사람’, ‘구름 화가’로 불리었다. 이 작품은 건초를 실은 수레가 잉글랜드 서퍽주의 스토어 강을 건너는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그린 것이다. 단지 풍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잊혀 가는 농촌을 ‘감성의 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오래 보고 있으면 마치 물 흐르는 소리, 풀 냄새,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그림은 1821년 런던 왕립아카데미 미술전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824년 파리 살롱전에서는 금상을 받으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유럽 미술사 속의 쾌거였다. 한마디로 영국의 풍경화가 유럽대륙의 심장인 파리에서 뜬 것인데 이제 풍경화가 더는 역사화, 초상화의 배경이 아니라 회화의 중심으로 격상된 것을 의미한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진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그림 5)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그림 5)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거장은 프리드리히(1774~1840)다. 그는 발트 해안가의 한 도시에서 양초, 비누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코펜하겐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그림 수업을 받은 후 드레스덴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고독, 죽음, 초월과 같은 인간 내면의 감정과 자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은 풍경화로 ‘북극해의 난파선’, ‘수평선 위의 달’ 등의 명작을 남겼다. 함부르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는 그의 대표작(그림 5)이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서 안개 낀 풍경을 바라보는 남성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안개 바다, 산 위에 정장 차림의 지팡이를 든 신사, 자연을 압도하는 듯한 뒷모습 등은 낭만주의적 요소다. 풍경은 실제 자연이라기보다는 내면적 사유의 공간을, 안개는 미래의 불확실성, 신사의 뒷모습은 대자연의 정복자가 아닌 보잘것없는 인간의 존재를 상징한 것이다. 즉, 풍경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물은 것이고 형이상학적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세기 동안 묻혀 있었다. 나치 정권이 이데올로기적 선전도구, 즉 게르만 민족의 정신성, 조국 숭배, 영웅적 고독으로 왜곡하면서 미술사에서 소외되어 있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실존주의 철학의 부상으로 재평가된 것이다.

낭만주의 미술은 모더니즘 미술로 가는 감성의 해방구

이렇게 낭만주의 미술은 개인의 ‘자유와 감성’ 중심의 시각예술이었다. 그렇기에 반권위주의적, 반계몽주의적, 반이성주의적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미술을 꽃피운 프랑스, 영국, 독일의 미술은 시대정신의 차이로 그 결이 달랐다. 프랑스는 저항적 낭만주의, 영국은 자연적 낭만주의, 독일은 철학적 낭만주의 미술을 구현한 것이다. 여기서 낭만주의 미술은 몇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인간 ‘내면의 감성’은 미술의 해방구가 되었다. 즉, ‘보여주는 미술’에서 ‘느끼는 미술’로 가는 문을 연 것이다. 둘째, 미술가들에게는 창작의 해방구가 되었다. 즉, 미술가들이 국가 권력이나 아카데미즘 미술의 시녀 역할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예술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셋째, 빛, 색채, 붓 터치의 해방으로 모더니즘 미술로 가는 해방구가 되었다. 즉, 이후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미술도 신고전주의 미술처럼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사회의 현실이 산업혁명의 심화로 더욱 냉혹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낭만주의 미술은 시대정신의 변화로 종언을 고하고, 민중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실주의 미술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