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금융당국, 대대적인 규제 완화

2025-06-05 13:00:04 게재

암호화폐 소송 취하·기후변화 공시규정 철회·전문투자자 장벽 낮춰

미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 폴 앳킨스가 4월 2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전방을 바라보고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규제 기조가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폴 앳킨스 신임 SEC 위원장 체제에서 SEC는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강화됐던 환경 공시 규정, 암호화폐 규제, 사모시장 접근 요건 등 주요 정책들을 줄줄이 뒤집고 있다.

SEC 내부에서 “규제는 공시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철학을 강조하고 있는 마크 우예다 위원은 최근 이코노미스트 팟캐스트 ‘머니 톡스’에 출연해 “SEC는 정책을 집행하는 기구가 아니다”며 “우리는 ‘증권 및 환경 위원회’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우예다는 특히 바이든 전임 체제에서 강화된 기후위험 공시와 사이버 보안 공시 등 일련의 규정을 ‘정치적 판단에 근거한 규제’라고 규정했다. 그는 “상장기업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재무정보가 아닌 정치적 의제가 주총 안건으로 상정되도록 허용한 것이야말로 SEC 역할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큰 변화는 암호화폐 규제다. 전임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이 ‘대부분의 암호자산이 증권에 해당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소송을 제기했던 반면, 현 체제는 입장을 바꿔 “사실상 암호화폐를 금지하는 효과를 낳았던 소송 전략은 효율적이지 않다”며 다수 소송을 취하하고 있다. 우예다는 “정책적 입장이 있다면 위원회 해석을 공식적으로 내야 한다”며 “사법적 검토를 받을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소송으로 규율을 만들려 한 시도는 절차상 문제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SEC는 현재 내부적으로 암호화폐가 증권에 해당하는지, 해당할 경우 어떤 방식으로 규제 체계를 적용할지를 검토 중이다. 우예다는 “자산유동화증권(ABS) 규제 모델을 적용한 전례를 참고해 암호화폐에도 합리적인 공시 기준을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사모시장에 대한 접근 규제 완화 역시 추진 중이다. 우예다는 “23세의 대학 졸업생이 40년 뒤 은퇴를 바라보며 장기적 투자에 나설 수 있다면, 사모펀드 투자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다만, 현재 연방노동부와 협의 중인 퇴직연금자산(IRA, 401k) 투자 허용 여부는 ‘규제 형평성’ 측면에서 더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예다는 또 “미국 상장기업 수가 30년 전 대비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점은 자본형성 측면에서 우려스럽다”며 “공시 항목이 지나치게 많아 기업 상장이 꺼려지는 구조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그는 “중요한 사안은 시장에 사전 예고하고 업계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야 한다”며 소송을 통해 규칙을 해석하려 한 기존 방식에서 탈피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SEC의 방향 전환은 트럼프 대통령과 암호화폐 산업 간 밀접한 이해관계 속에서 더욱 주목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직접 설립한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을 통해 암호화폐 사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또 트럼프 일가가 소유한 밈코인(온라인 유행이나 농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암호화폐)의 가치는 20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SEC가 집행 중이던 암호화폐 규제를 대거 철회하면서 대통령 가족이 직접 이해관계를 가진 산업에 규제 유예 조치를 취했다는 점은 이해충돌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