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범행 전모 몰라도 공범”

2025-06-11 13:00:31 게재

대법 “미필적 고의 인정” … ‘2심 무죄’ 파기 환송

“현금 받아 ATM 송금, 이례적·불법 알 수 있어”

단순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이더라도 범행에 가담한다는 인식이 미필적으로 있었다면 범행 전모를 몰랐더라도 공범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지난달 15일 사기, 사문서위조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1일 밝혔다.

A씨는 2022년 3월 인터넷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했다가 보이스피싱 조직원인 이른바 ‘김미영 팀장’으로부터 고객을 만나 퇴직금 등 서류를 의뢰인에게 전달하는 업무를 제안 받았다.

김 팀장은 A씨에게 월급을 10원 단위까지 제시하며 근로계약서를 쓰게 했고, 신분증 사본과 비상연락망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정상적인 입사 절차를 밟는 것처럼 꾸몄다.

A씨는 일을 시작한 후 첫 3~4일 간은 퇴직금 정산 명세서를 고객의 집으로 배달해 주는 일을 했으나, 얼마 뒤 텔레그램을 통해 지시를 받고 현금수거 업무를 맡게 됐다.

A씨는 지시를 따라 자신도 모르는 인물들의 부탁으로 왔다는 식의 말만 하면서 피해자들로부터 현금을 받았다. 채용된 업체와 무관한 금융감독원장 명의의 공문을 텔레그램으로 받아 출력해 피해자들에게 교부하기도 했다.

또 현금을 약 100만원씩 쪼개 피고인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인적사항을 이용해 제3자에게 무통장으로 보냈다.

A씨는 이런 방식으로 지난 2022년 4월 5~12일 피해자 8명으로부터 9차례에 걸쳐 합계 1억6900만원을 편취한 다음 타인의 명의를 사용해 송금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팀장을 가장한 조직원에게 현금수거 업무가 불법이 아닌지 물었으나 ‘고객들의 요청’이라며 달래자 일단 믿고 일을 진행해 왔다. 그러다 범행 마지막 날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을 다룬 영상을 본 뒤 다음날 자수했다.

1심은 ‘현금수거책’은 보이스피싱 범행이 완성되는 데 필수적인 역할로서 비교적 단순 가담자라고 하더라도 그 죄책이 가볍지 않다는 취지로 A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사기죄 등에 대해 고의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 팀장에게서 금융결제 대금 등에 관련된 서류를 전달하는 업무를 제안받는 등 이씨가 정상적인 회사일을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는 등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A씨가 현금수거 업무가 불법임을 강하게 의심할 수 있는 여러 정황 증거가 있었음에도 별다른 거리낌 없이 업무를 해 왔다며 처벌하는 게 맞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반드시 보이스피싱 범행의 실체와 전모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만 각각의 범죄의 공동정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피고인은 현금수거업무를 통해 보이스피싱 등 범행에 가담하는 것임을 알았거나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필적 고의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채용절차의 비정상 △담당업무의 비정상 △보수지급의 비정상 △피고인의 나이 지능 경력 등으로 자세히 설시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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