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긴 호흡의 ‘성장전략’이 필요하다
수렁에 빠진 경제를 살려내려는 새 정부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불황과의 일전을 치른다는 일념으로 내수침체에 적극 대응하겠다”며 취임 후 첫 행정명령으로 ‘비상경제대응 태스크포스’ 구성을 지시했다.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는 국회 청문회 준비를 위한 사무실로 첫 출근하며 “지금은 제2 IMF(국제통화기금)위기 같은 상황”이라며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민생”이라고 했다.
국정 최고책임자와 2인자가 집무 최우선순위를 경기부양에 두겠다는데 입을 모을 정도로 요즘 상황이 심각하다. 지난 4월 생산·소비·투자가 모두 석 달 만에 동반 감소했고, 5월에는 수출마저 넉 달 만에 마이너스(-1.3%)로 돌아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한 국내외 연구기관들이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0%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터다.
비상대응조치도 필요하지만 경제체질 뜯어고칠 근본적 구조개혁 시급
당연히 비상대응조치가 필요하지만, 허약해진 경제 체질을 뜯어고칠 보다 근본적인 구조개혁이 시급하다. 우리 경제를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은 근본 원인이 산업 전반의 생산성과 효율성 하락에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의존도만 높아졌을 뿐 지난 20년간 달라진 게 거의 없는 10대 수출품목 구성이 ‘고인 물’에 갇힌 한국 산업계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확인받고 있는 ‘K원전’과 방산, 조선 등의 선전(善戰)이 반갑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한국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 신성장 산업 육성을 더 이상 미적거려서는 안 된다. 새 정부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선거공약집에서 ‘잠재성장률 3% 진입’을 목표로 한 ‘진짜성장전략’을 발표했다. 인공지능(AI) 등 국가 첨단전략산업에 100조원을 투자하고, 산업 생태계를 뒷받침할 첨단전략산업기금을 설치하겠다는 등의 정책구상을 내놨다.
새 정부가 ‘진짜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 꼭 유념해야 할 게 있다. 정부와 기업, 가계 등 경제주체들의 역할을 잘 구분해서 정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일에 정책과 행정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별 기업들이 해결할 수 없는 주요 산업분야 인력 양성과 산업인프라 확충 등에 특히 주력해야 한다. 중국이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드론, 5G네트워크장비, 태양광, 바이오 등 신산업에 도전장을 던진 지 불과 10여년 만에 세계 최정상에 오른 것은 정부가 관련 인력양성 등에 국가 차원의 중·장기 계획을 세워 치밀하게 실행한 덕분이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로봇 등 신기술산업에 대해서 미국 실리콘밸리 수준 이상으로 규제를 풀어 기업들의 활발한 진출과 치열한 개발 경쟁을 이끌었다.
대만이 AI산업의 세계적 강국으로 급부상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정부가 긴 안목으로 산업지원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인 인력 양성과 공급에 나선 덕분이다. 강력한 인공지능(AI)·반도체 인재 육성에 특히 심혈을 기울여서 국립대학들이 매년 500명이 넘는 석·박사급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그 배경에 대만정부의 ‘결단’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주력 산업들의 붕괴로 경제 전체가 큰 수렁에 빠지자 반도체산업에서 돌파구를 찾기로 하고는 대학에서 반도체를 가르칠 교수들을 대거 채용했다. 그 결과 대만국립대에만 반도체 전공 교수가 50명에 이른다. 20명에 불과한 서울대보다 두 배 이상 많다.
한국은 거꾸로 행보를 해 왔다. 공과대학들의 학과별 정원 조정을 어렵게 해 AI 등 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신기술인력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서울공대의 850~900명 정원 가운데 매년 120~130명이 의과대학 재입학을 위해 빠져나갈 정도로 우수 인재들의 의대 쏠림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진짜 성장' 위해 능동적 기업활동 보장하는 제도 환경 개선부터
일선 기업들의 신기술·신산업 연구개발 의욕을 꺾는 규제환경 혁파도 시급하다. 대표적인 게 획일적이고 경직적인 근로시간 규제다. 이 대통령도 야당대표 시절 “(연구 개발자 본인들이 중요 과제를 해내기 위해) 더 일하겠다는 걸 왜 막느냐는 데 할 말이 없더라”고 토로했던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 R&D인력 근로시간 규제부터 서둘러 개혁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시 힘차게 성장 발전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규제·관리가 아니라 지원·격려하는 정부가 돼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기업 활동을 보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첫걸음으로 국가차원의 체계적인 신산업 R&D인력 양성계획을 세우고 우수 인재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 환경을 개선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