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과 쉬운 우리말
품격 있는 쉬운 말로 된 ‘헌재 탄핵 판결문’ 국어 수업 소재로
설득력 있는 쉬운 말, 배려와 인권의 토대 … 교실 수업 통해 학생들 언어 습관으로 자리 잡고 사회 확산 노력
공공언어는 국민의 안전과 권리에 직결되기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같은 인식을 넓히기 위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쉽고 바른 우리말 사용 교실 사업’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추진됐다. 배재고 선덕고 원묵고 한대부고 등 4개 학교가 참여한다.
올해 쉬운 우리말 교육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문’을 수업 소재로 삼아 눈길을 끌었다. 법률 용어로 가득한 공적 문서를 어떻게 쉽고 품격 있게 바꿀 수 있을지를 탄핵 판결문을 기반으로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공공언어, 누구에게나 쉬워야 한다 = 공공언어란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이 국민과 소통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뜻한다. 주민센터 안내문, 병원 안내표지, 학교 가정통신문, 각종 행정문서 등이 모두 해당된다. 그러나 지금의 공공언어는 꼭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음에도 외국어나 한자어 전문용어가 남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디지털 디바이드 해소를 위한 스마트 디바이스 보급 사업’이라는 말은 청소년이나 어르신에게는 첫 단어부터 막히는 문장이 될 수 있다. ‘정보 격차를 줄이기 위해 똑똑한 기계를 나눠주는 사업’처럼 풀어 쓸 때 비로소 의미가 와 닿는다.
특히 청소년들은 학교에서조차 공공언어를 직접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그 결과 공공언어에 대한 감수성이나 비판적 시각도 형성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국어문화원연합회와 내일신문은 쉬운 우리말을 가르치고, 경험하게 하는 교육적 접근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론과 실천 갖춘 언어운동 필요 = ‘쉬운 우리말을 쓰자’고 주장을 하면 종종 ‘한글 운동’ 혹은 ‘외국어 반대 운동’으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단순한 감성적 호소나 당위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한글을 사랑하자’는 말만으로는 국제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과 시민들이 언어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쉬운 우리말 수업 사업의 경우, 분명한 이론적 기반을 갖추려 노력하고 있다. 쉬운 우리말 사용은 단지 ‘순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언어 순수주의를 넘어 정보 접근성과 표현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실질적 수단이다.
쉬운 말은 배제의 언어를 포용의 언어로 바꾸는 힘을 가진다. 누구든, 어떤 배경이든 말 때문에 소외받지 않고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쉬운 우리말 사업의 근본적 철학이다.
◆청소년이 바로 내일의 공공언어 사용자 = 청소년에게 쉬운 우리말을 가르친다는 건 단지 글쓰기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언어 환경을 설계하는 일이다. 쉬운 말은 단순하고 유치한 말이 아니라 핵심을 명확히 전달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품격 있는 언어다. 청소년이 공공언어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안을 스스로 고안해보는 경험은 자신이 ‘말하는 시민’이라는 자각을 키워준다.
실제로 쉬운 우리말 수업에서는 참여 학생들이 공공기관 문서나 행정 절차를 해석하고, 이를 쉬운 말로 바꾸는 실습을 하며 놀라운 흡수력을 보였다. 이들은 단지 언어를 고친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 소통 방식 자체를 질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수업 속으로 들어온 탄핵 판결문 = 올해 쉬운 우리말 수업에선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 수업 자료로 활용된 것이다. 이 판결문은 총 114쪽 분량에 달하며 일반 시민은 물론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어렵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본 학생들과 교사들은 이 결정문이 “의외로 쉽게 읽히고 논리가 명쾌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단순히 대통령 파면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기록을 넘어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와 민주주의의 원리를 ‘보통 사람의 언어’로 설명한 점이 특히 주목받았다. 복잡한 법리를 단순하고 평이한 문장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한 이 결정문은 쉬운 우리말이 단지 친절함의 문제가 아니라 공적 소통의 본질임을 보여줬다.
국어 수업 현장에서도 이 점이 적극 반영됐다. 이번 사업에 함께하는 4개교 중 먼저 수업을 진행한 원묵고와 배재고 학생들은 이 판결문 속 주요 문장을 함께 읽고 논리의 전개 방식과 설득 전략, 문장 표현의 특성을 분석했다. 단어 선택 하나, 문장 구조 하나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며 “이 글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좋은 법조판결문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되묻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보영 원묵고 국어 교사는 “이번 수업은 단순한 판결문 읽기를 넘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시간이었다”며 “쉬운 말이 곧 설득력이고, 설득력 있는 언어가 곧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점을 학생들이 실감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원래 4회 차로 구성했던 수업을 6회 차로 늘려야 할 정도로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고 덧붙였다.
배재고에서는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의 취지와 기본 원칙을 익힌 뒤 판결문을 읽고 공공언어가 갖춰야 할 요소가 쉬운 말과 간결한 문장이라는 것을 도출해냈다. 배재고 학생들은 “판결문이 쉽게 쓰일 때 가장 큰 장점은 정보가 명확하게 전달된다는 점”이라면서 “이번 수업을 통해 법조문이 쉬운 말로 표현되면 국민이 법에 느끼는 거리감이 줄어들고 법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수 있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법조문은 모든 국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선덕고와 한대부고는 다음 학기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쉬운 말로 쓰인 법률, 자존감 상승 불러 = 법률 문장은 정확해야 한다는 이유로 흔히 어렵고 폐쇄적인 표현을 쓰기 쉽다. 하지만 ‘정확성’과 ‘쉬운 말’은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다. 잘 쓰인 법률 문장은 명확하고 간결하며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사법연수원 교재 ‘민사실무2’는 “판결문을 잘 쓰는 진짜 어려움은 논리 구조와 법률 사실의 판단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판결문의 품질을 결정짓는 요소가 복잡한 용어나 현학적 문장이 아니라 삼단논법에 기반을 한 명료한 논리와 구성요건 판단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쉬운 언어로 쓰는 것이 결코 법률적 깊이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 이론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에서는 법률가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해왔다. 20세기 초 법학자 존 위그모어는 법률가가 읽어야 할 책으로 문학 작품 100권을 추천했고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법은 누적된 창작물이며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한 역사적 결과물”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법률 문장 역시 시대정신과 가치관을 담아야 함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쉬운 말은 단지 표현 방식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이란 것이다.
이번 헌재 결정문은 헌법의 가치와 민주주의의 원리를 국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냈다는 점에서 교육적 사회적 의미가 크다. 실제로 이번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어려운 법리도 이렇게 쓰일 수 있다면 국민 누구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쉬운 말’은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정보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회적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앞으로도 국어문화원연합회와 내일신문은 쉬운 우리말이 교실 수업에서 출발해 학생들의 언어 습관으로 자리 잡고 나아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정규수업형으로 운영한 4개교 외에 추가로 2개 학교를 선정해 관련 학과 교수가 직접 학교를 두 차례 방문하는 ‘탐구집중형’ 수업도 새롭게 진행한다.
이와 함께 학교 현장을 넘어 일상과 사회로 쉬운 우리말 쓰기 문화가 퍼질 수 있도록 여러 학교, 교사, 지역 언어기관과 협력도 더욱 강화해나갈 방침이다.
송현경 기자·김한나 리포터 funnyso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