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정의 인도 톺아보기
‘해양 인도’의 부상이 보여주는 교훈
인도 남서부의 항구도시 코친(Cochin)은 인도가 해양강국으로 도약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인도 최대 국영조선소인 코친조선소(CSL)가 위치한 이곳은 중국의 ‘진주목걸이’ 전략에 맞서는 인도의 전략적 서부 거점으로 부상 중이다. 지난 7월 4일 CSL은 HD한국조선해양과 조선·해양 방산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내륙의 북서부 국경(중국 파키스탄)에서 오는 군사적 위협에 전략자원을 집중해왔다. 영국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제한적 연안함대에서 출발한 인도 해군은 독립 후에도 예산·조직·전략측면에서 군 내 비중이 낮았다. 1970년대까지 해군 비중은 10% 내외에 머물렀고 2004년까지 공식 해양전략 문서조차 없었던 것은 ‘육지 국가 패러다임’이 정책·군사계 핵심 엘리트에 심층적으로 내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2000년대 중국의 부상은 모든 것을 바꿨다. 2008년부터 소말리아 해역에 해적 퇴치 명분으로 중국 해군 함정을 상시 파견한 것은 인도에겐 중국 해군이 인도양에 상주하기 시작한 신호였다. 2017년 지부티에 중국의 첫 해외 군사기지가 들어서면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파키스탄 과다르, 스리랑카 함반토타, 미얀마 깍퓌로 이어지는 ‘진주목걸이’는 인도를 해상에서 포위하는 전략적 딜레마였다.
2008년 뭄바이 테러사건은 인도 해양안보 전략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이 해상을 통해 침투해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건을 계기로 인도는 영해를 포함한 광범위한 관할해역의 통합적 통제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맞서 인도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전략으로 응답했다. 이란 차바하르항 개발, 오만 두큼과 싱가포르 창이 기지 접근권 확보, 몰디브·스리랑카에 해안레이더 설치 등 역내 전략거점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중국에 바다를 내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인도 해양안보 정책의 근간이 된 것이다.
모디의 ‘SAGAR’ 구상 10년
2015년 3월 모디 총리는 모리셔스 연설에서 ‘인도양 지역 내 모든 국가의 안보와 성장을 추구하는 정책(SAGAR)’ 구상을 처음 제시하며 인도를 “인도양의 안보와 번영의 책임 있는 주체”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천명했다. “모든 국가의 해양 이익을 존중하고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며 해양협력을 증진하겠다”는 이 원칙 아래 인도는 지난 10년간 해양역량을 키워왔다.
인도 해군은 말라카 해협에서 아덴만까지 이어지는 바다에서 해적 퇴치 작전과 인도적 지원활동(HADR)에 앞장서며 ‘진정한 안보제공자(net security provider)’의 역할을 자임했다. 실제로 인도 해군은 주변국 선박 피랍 사건 등에서 가장 먼저 대응(first responder)하는 국가 중 하나로서 자유로운 항행과 법치에 기반한 해양 질서를 지키는 데 기여를 높이고 있다.
라즈나트 싱 인도 국방장관은 “인도 해군은 인도양에서 어떤 국가도 압도적 경제·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억누르지 못하게 보장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인도는 해양영역인식(MDA)을 높이기 위해 주변 도서국들에 연안 감시 레이더망을 구축하고 말레이시아·세이셸 등과 해양정보 공유를 확대하는 등 다층적인 협력도 추진하고 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SAGAR는 최근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모디 총리는 2025년 3월 다시 모리셔스를 찾아 업그레이드 버전인 ‘마하사가르(MAHASAGAR)’ 구상을 발표했다. 힌디어로 ‘대양(大洋)’을 뜻하는 MAHASAGAR는 명칭 그대로 인도의 해양비전을 인도양 지역을 넘어 전세계 글로벌사우스로 확장하는 청사진이다.
무역을 통한 개발협력, 지속가능 성장역량 구축, 상호 안보증진 등을 포괄하는 이 비전 하에 인도는 개발도상 해양국가들에 대한 기술공유, 양허성 차관 지원까지 포함한 전방위 해양 외교를 예고하고 있다. 모디 총리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안전한 인도양이 모리셔스와 인도의 공동 우선순위”임을 언급하며 중국의 인도양 활동 증대에 함께 대비할 뜻을 밝혔다.
동맹없는 다자협력, 인도의 해양안보 연대
인도는 전통적으로 동맹보다 전략적 자율성을 중시해왔지만 해양에서는 유례없이 폭넓은 파트너십을 전개하고 있다. 미국 일본 호주와의 쿼드(Quad)협력은 그 중심 축이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인도 해군 합동훈련 말라바르(Malabar)는 이제 쿼드 4개국이 참가하는 연례 대규모 훈련으로 자리잡았다. 2023년 호주 시드니 인근에서 개최된 말라바르 훈련에서는 항모와 핵잠수함까지 동원해 복잡한 연합 해상작전 능력을 과시했다.
한편 인도는 미·인도 간 군사물자교환협정(LEMOA)을 비롯해 프랑스 호주 한국 일본 등과 상호 군수지원 협정을 맺고 각국 군항과 기지를 상호 활용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인도 해군 함정은 아시아-태평양부터 중동까지 원해(遠海) 작전반경을 넓히고 있다.
동시에 인도는 유럽 및 아세안과도 해양안보 협력을 강화했다. 2023년 5월 싱가포르에서는 인도와 아세안 10개국이 처음으로 ‘아세안-인도 해상훈련(AIME)’을 공동 실시했다. 남중국해에서 펼쳐진 이 다자훈련은 해양 수색·구조부터 함정 기동, 해적 대응까지 포괄하며 인도-동남아 간 안보 공조의 새 장을 열었다.
유럽연합(EU)과 인도의 해군 협력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작년 10월 인도 해군 함정은 EU 해군강화협력 임무대와 함께 아프리카 기니만에서 합동순찰을 벌였고 올해 6월에는 인도양에서 EU 해군과 본격적인 연합훈련을 처음으로 전개했다.
EU측은 “인도양의 전략적 중요성은 EU에도 인도만큼 중차대하다”며 해양안보 대화와 연합훈련을 정례화하고 있다. 이러한 협력 확대는 규칙기반의 해양질서 유지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도양을 넘어 태평양과 대서양 해역까지 협력의 지평은 보다 넓어지는 추세다.
미국 주도의 다자훈련에도 인도는 적극 참여하고 있다. 2025년 3월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실시된 다국적 대잠수함 훈련 ‘씨 드래곤(Sea Dragon) 2025’에는 인도와 한국 일본 호주 미국이 함께했다. 각국 해상초계기가 투입된 이 훈련에서 참가국들은 가상의 잠수함 표적을 놓고 탐지 및 추적 경쟁을 벌이며 상호 운용성을 높였다.
이처럼 인도 해군은 동맹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해양안보 연대를 통해 사실상의 다자 동맹망을 형성하고 있다. 인도 입장에서는 독자노선을 견지하면서도 협력의 스펙트럼을 최대한 넓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을 구현하려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해양안보를 둘러싼 국제 공조에 인도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전략적 자율은 실용적 연대 위에
중국의 해상 팽창이라는 실질적 위협에 직면한 인도는 쿼드, EU, 아세안과의 다층적 해양협력을 통해 전략적 자율성을 실용적으로 구현해왔다.
한국 역시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18년 이후 중국은 서해 잠정공동조치수역(PMZ)에 대형 구조물을 잇달아 설치하며 회색지대를 활용한 통제 확대에 나섰다. 그러나 한국의 대응은 아직 제한적이며 단일 국가 차원의 대응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감시와 훈련, 산업을 아우르는 입체적 연대 체계의 구축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 한국은 해양영역인식(MDA) 협력을 확대해 황해·동중국해·동해를 포괄하는 통합 감시망을 미국 일본 유럽 아세안 등과 공동 구축할 필요가 있다. 해상훈련도 특정 허브에 얽매이지 말고 말라바르나 유럽 연합훈련처럼 유연한 다자 참여 방식으로 정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조선·해양장비·해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전략산업 협력을 강화한다면 한-인도 양국은 해양안보와 산업 경쟁력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