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진의 미국 톺아보기
트럼프의 ‘연준 리셋’과 케빈 워시의 위험한 실험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새로운 연준 의장 인선을 둘러싸고 시장의 시선은 한동안 케빈 헤셋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에 쏠려 있었다. 헤셋은 트럼프의 핵심 경제 참모로 1기 행정부 시절 대규모 감세 정책을 설계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저금리 정책을 가장 충실하게 실행할 수 있는 ‘트럼프의 복심’이라는 점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시장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트럼프 대통령이 낙점한 인물은 매파의 대명사이자 시장 원칙주의자로 분류되는 케빈 워시였기 때문이다. 통화정책의 규율과 연준의 독립성을 중시하는 인물로 알려진 워시는 오히려 트럼프의 즉흥적 성향과 더 큰 충돌을 빚을 수 있는 선택지로 평가받기도 했다.
실제로 워시의 연준 의장 지명 소식이 전해진 지난 2일, 뉴욕 증시는 물론 아시아 주요 증시까지 세계 금융시장은 일제히 출렁였는데, 이는 트럼프의 파격적인 선택이 향후 통화정책의 방향성과 정책 일관성에 어떤 불확실성을 가져올지에 대한 시장의 본능적인 불안이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자신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해 온 연준 의장 제롬 파월을 노골적으로 압박해 온 트럼프의 불같은 성정에 비추어 본다면,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예스맨’ 대신 ‘불편한 원칙주의자’ 워시를 택한 것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번 지명자를 통해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워시 지명은 트럼프의 좀 더 큰 그림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의 연준 지명자, 그 사상의 실타래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케빈 워시의 철학을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워시는 원래 “물가가 무너지면 금융이 무너지고, 금융이 무너지면 경제와 사회 질서까지 흔들린다”고 믿으며 웬만하면 금리를 내려선 안 된다고 주장하던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매파였다.
통화 가치의 안정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 중앙은행은 대중의 인기 영합주의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최근 워시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이 변화의 타이밍은 공교롭게도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과 겹치는데, 워시는 AI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규제 완화 덕분에 생산성은 앞으로 크게 오를 것이고, 공급 능력이 이처럼 구조적으로 확충된다면 물가 걱정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 나아가 워시는 생산성 혁명으로 잠재 성장률이 높아진 지금 상황에서는 과거의 잣대로 높은 금리 유지는 오히려 경제의 역동성을 죽이는 행위라는 논리까지 편다. 또 한편 워시는 연준의 거대한 자산 규모, 즉 양적완화(QE)를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경계한다.
워시는 양적완화가 정부의 방만한 재정을 뒷받침하고, 자본이 생산적인 곳이 아닌 엉뚱한 자산 거품으로 유입되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연준의 독립성을 훼손했다고 본다.
심지어 그는 QE가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을 가중시켰다고 믿고 있으며 연준 의장이 되면 연준이 들고 있는 막대한 채권을 과감히 줄이거나 팔아치우는 ‘작은 연준’을 지향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연준 자체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도 워시는 연준이 기후변화나 인종 문제 같은 정치적 의제에 관여하는 ‘미션 크립’을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중앙은행이 본연의 임무를 벗어나 정치적 선동에 휘둘리는 순간 통화정책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추락한다는 것이다.
QE에 대한 경계와 '작은 연준' 지향
이러한 워시의 견해는 뜻밖에도 트럼프의 경제 철학과도 완벽히 궤를 같이한다. 가령 트럼프 행정부는 실업률 하락과 임금 상승이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미 연준의 전통적 거시경제 모델인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을 정면으로 비판해 왔다. 그간 트럼프 행정부는 경기 호황이라는 이유로 금리 인하에 소극적이었던 제롬 파월 체제의 연준을 강력히 비난해왔는데, 워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트럼프에게 강력한 논리적 무기를 제공한다.
워시는 “성장이 곧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사고방식은 산업화 시대의 유물”이라며 과거 연준의 정책 기조를 부정한다. 대신 AI와 자동화가 주도하는 생산성 혁명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면, 임금이 상승하더라도 물가 압력은 충분히 제어될 수 있다는 혁신적 논리를 제시한다. 이는 성장을 최우선시하는 트럼프에게 매우 유용한 정치적, 이론적 도구가 된다. 또한, 정부와 공공기관의 비대함을 척결하기 위해 정부효율부(DOGE)까지 신설한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 양적완화(QE)에 비판적인 워시 체제의 연준은 최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연준이 시장 왜곡을 최소화하며 건전한 재정 질서를 확립해 나간다면,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행정부의 긴축 노력과 강력한 정책적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재정적자와 이자 상환 부담에 직면한 트럼프 행정부에게 워시는 거부하기 힘든 카드다. 연준의 대차대조표를 축소해 통화의 ‘수량’은 엄격히 관리하되, 동시에 금리 인하를 병행하겠다는 워시의 구상은 재정 부담 완화와 경기 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트럼프에게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금융 규제나 기후 리스크까지 떠안는 지금의 연준 역할 확장을 경계하는 워시의 생각 역시 연준 본연의 기능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트럼프식 행정 철학과 일치한다. 트럼프 행정부에게 있어 워시는 비록 행정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는 아니지만, 대척점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기에 오히려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균형감 있는 인선인 것이다.
‘AI 생산성 가설’에 대한 시장의 의문
그러나 워시가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적 구상이 과연 시장의 안전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연준과 행정부 사이의 ‘독립성과 공조’라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가 관건이다. 워시는 연준의 독립성 수호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행정부와의 유기적인 정책 공조를 강조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선이 흐려지는 순간, 연준은 ‘백악관의 금고지기’라는 낙인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가 전제로 삼는 ‘AI 생산성 가설’에 대한 실증적 검증도 문제다.
AI가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가능성이 크고 이러한 기대감이 이미 미 증시에 선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월가와 학계 내에서 끊이지 않는 ‘AI 거품론’은 여전히 유효한 반론이며, 아직 실증되지 않은 미래 가치를 현재의 통화 정책 판단 근거로 삼는 워시의 선택은 분명 위태로운 측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양적긴축(QT)의 기술적 난이도를 간과할 수 없다.
지금까지 연준과 행정부는 금리를 인하하며 유동성을 공급(QE)하거나, 금리를 인상하며 유동성을 회수(QT)하는 식의 일관된 방향성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금리를 낮추면서 동시에 시장 유동성을 거둬들이는 정책 조합은 전례가 없는 시도다. 매파적 포지션을 견지하면서도 기술 혁명이 인플레이션을 제어해 줄 것이라는 낙관, 그리고 금리 인하와 유동성 제한이라는 상반된 정책의 병행은 연준을 거대한 정책 실험실로 탈바꿈시켰다.
이 실험이 파월 체제가 남긴 연준의 유산을 지우고 트럼프가 꿈꾸는 이상적인 연준상을 구현할지, 아니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또 한 번의 파괴적인 ‘이론적 도박’으로 끝날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계 금융시장이 새로운 연준 의장 후보의 일거수일투족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으며, 세계 경제가 그의 예측 불가능한 정책 실험을 향해 깊은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