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변혁가들, 퍼스널컴퓨터 태동에 영향
UC버클리 반전운동가 프레드와 펠젠스타인, 실리콘밸리 개인용 컴퓨터 혁명 불지펴
시간이 흐르면 국외 생활은 하나의 점으로 남는다. 필자에게 점은 주로 커피숍으로 존재한다. 십여년 전 이란을 떠올리면 테헤란 북부 타지리시 광장의 ‘라미즈(Lamiz) 커피’가 생각난다. 수년 전 미국 서부를 상기하면 UC버클리 앞 ‘카페 스트라다(Strada)’가 머릿속을 맴돈다. 낯선 땅에 일하러 가면서 마음을 녹일 공간부터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은 자연스러웠다. 두 도시의 두 공간이 녹록잖은 이국의 시간을 헤쳐 나가는 버팀목이었다.
3년간의 미국 실리콘밸리 근무가 중반부를 향해 가던 때였다. 주말 아침만 되면 카페 스트라다를 찾아 커피를 시키고 UC버클리 학생들을 관찰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뭐라도 쓰는 척을 했지만 거대한 질문을 마주한 청년은 막막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근무 내내 놓지 않았던 질문은 ‘개인용 컴퓨터 산업은 왜 미국 동부가 아닌 서부에서 태동했는가’였다. 커다란 질문답게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한국에 온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프레드, 반전운동가에서 컴퓨터 애호가로
시계를 60년 전으로 돌려 1960년대 UC버클리 캠퍼스로 가보자. 우리로 치면 59학번인 한 신입생이 대학에 입학한다. 그의 이름은 프레드 무어(Fred Moore)다. 펜타곤에 근무하던 육군 대령의 아들인 그는 UC버클리에서 공학을 전공하기 위해 서부로 왔다. 당시는 베트남에서 미군의 병력 증대가 시작되기 전이지만 무어는 입학 후 반전시위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UC버클리 캠퍼스의 스프라울(Sproul) 플라자에서 의무 학군사관 양성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팻말을 들고 야영을 시작했다. 시위는 이틀 만에 끝난다. 이후 그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1962년 UC버클리에 재입학해 저항적 움직임을 이어갔다.
프레드 무어는 징집 거부로 2년간 수감되었고 1968년 팔로알토로 이주했다. 아내는 떠났으며 아기나 다름없는 딸과 함께 폭스바겐 밴을 타고 떠도는 삶이 시작됐다. 무어는 팔로알토에서 반전운동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스탠퍼드 메디컬 센터’에서 컴퓨터를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누구도 그를 쫓아내지 않았기에 병원에서 컴퓨터를 다루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무어는 점점 컴퓨터가 사람들에게 삶의 주도권을 부여하고 공동체를 형성하게 도울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시민들이 컴퓨터를 개인의 자율성과 학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 궁극적으로 해방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무어는 자연스레 팔로알토에 형성된 테크놀로지 활동가 단체와 연결된다. 피플스 컴퓨터 컴퍼니(People’s Computer Company)가 대표적이었다. 이름과 달리 이는 실제 회사가 아니었고 출판물을 통해 지역사회의 컴퓨터 접근성을 향상하고 교육을 제공하는 단체였다.
피플스 컴퓨터 컴퍼니의 뉴스레터는 컴퓨터 교육, 프로그래밍, 학습 박람회, 자가 기술축제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실었다. 이는 전자제품광, DIY 애호가, 지역 학습 조직가를 하나로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허름한 뉴스레터였지만 그들은 ‘컴퓨터 권력을 사람들에게(Computer power to the people)’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1972년 10월 창간호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손글씨 선언문을 게재했다.
“컴퓨터는 대부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반하여 사용된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통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모든 걸 바꿀 시간이다. 우리에겐 사람들을 위한 컴퓨터 회사가 필요하다.”
통신기술로 투쟁에 나선 ‘언론자유운동’
UC버클리 출신으로 저항적 움직임과 컴퓨터를 연결한 또다른 인물은 리 펠젠스타인(Lee Felsenstein)이다. 1963년 UC버클리에 입학해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는 반전운동가였다. UC버클리에서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펠젠스타인은 자신의 공동체 조직 본능과 전자기기에 열광하는 괴짜 성향을 결합해 통신도구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펠젠스타인은 특히 미국 공동체 문화에 깃든 DIY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통신 도구에 대한 공공의 접근을 통해 시민들이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1964년 10월 UC버클리 캠퍼스는 언론자유 운동이 한창이었다. 펠젠스타인은 기술을 무기 삼아 투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비폭력적인 무기를 찾고 있었고 ‘정보의 흐름’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비폭력 무기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의 말이다.
펠젠스타인의 중요한 통찰은 ‘새로운 형태의 통신 네트워크야말로 권력을 되찾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언론자유 운동의 본질로 보았다. 그는 사람과 사람 간 소통을 촉진할 수 있는 정보구조가 어떤 형태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쇄매체를 시도해 자신이 속한 학생 협동조합의 뉴스레터를 창간했다. 그는 인쇄물이 새로운 공동체 매체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곧 실망한다. “점점 중앙집중적 구조로 변하더니 볼거리만을 판매하는 형태가 되었어요.” 펠젠스타인의 고백이다.
그는 미래사회를 형성할 힘이 매체 유형의 차이에서 갈린다고 내다봤다. 우선 텔레비전처럼 중앙 지점에서 동일한 정보를 전송하고 수신자로부터 아무런 피드백 채널도 제공하지 않는 방송매체 방식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비(非) 방송형 매체로 ‘모든 참여자가 정보 수신자인 동시에 정보 생산자’인 형태였다. 펠젠스타인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야말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기술을 통해 권력의 중심이 ‘사람들’에게 이전될 것으로 예상했다.
펠젠스타인은 이 아이디어를 물고 늘어졌다. 바로 컴퓨터 네트워크에 대한 공공의 접근이 가능해지면 사람들은 DIY 방식으로 관심사 기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커뮤니티 메모리(Co-mmunity Memory)’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컴퓨터를 공공 전자 게시판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커뮤니티 메모리는 이후 인터넷 게시판(BBS)과 같은 온라인 서비스의 인도자 역할을 했다. 펠젠스타인은 훗날 회고한다. “우리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문을 열었고, 그곳이 따뜻한 세계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펠젠스타인은 천부적인 조직가답게 자신의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프레드 무어와 함께 피플스 컴퓨터 센터의 저녁 모임에 주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이 모여 계속 토론한 주제는 ‘개인용 컴퓨터가 실제로 생겨난다면 어떤 모습일까’였다. 1975년 초 저녁 모임을 마치며 무어와 펠젠스타인은 새로운 동호회를 출범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만든 팸플릿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은 컴퓨터를 직접 만들고 있나요? 단말기? TV 타자기? 아니면 디지털 마법 상자 같은 것? 그렇다면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에 참여해 보세요.”
애플을 낳은 ‘홈브루 컴퓨터클럽’
‘홈브루 컴퓨터클럽(Homebrew Computer Club)’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호회의 첫번째 모임은 허름한 차고에서 열렸다. 머지않아 홈브루 컴퓨터클럽은 당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디지털 세계의 열성적 인물 간 교차점으로 급성장한다. 단시간에 실리콘밸리와 개인용 컴퓨터 혁명의 중심으로 우뚝 선 것이다.
홈브루 컴퓨터클럽의 대표적 회원이 애플을 공동창업한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다. 둘은 주기적으로 홈브루 컴퓨터클럽에 참가해 개인용 컴퓨터 기술을 시연했다. 배경도 성향도 다른 사람들이 꾸준히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 모두는 개인용 컴퓨터가 존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당시 IBM으로 상징되던 컴퓨터의 조직적 권력과 제도적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컴퓨터 산업은 매사추세츠로 대표되는 미국 동부가 이끌었다. 하지만 동부의 업계 거물들은 개인용 컴퓨터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했다. 매사추세츠에서 컴퓨터 사업을 전개한 ‘디지털 이큅먼트 코퍼레이션’의 창업자 케네스 올슨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1977년 그는 “개인이 집에 컴퓨터를 갖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There is no reason for any individual to have a computer in their home)”고 잘라 말했다.
결국 컴퓨터가 개인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매체가 되리라는 선구적 깨달음은 미국 서부의 유산이다. 우리는 UC버클리의 59학번과 63학번 대학생 두 명에게 적잖은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