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관세’ 본질은 ‘일자리’다
트럼프 발 ‘관세전쟁’에서 한국이 한숨을 돌리게 됐다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한미 협상대표단은 미국이 ‘25% 관세부과’를 선언했던 8월 1일을 하루 앞두고 극적인 타결에 합의, 미국의 대한 수입관세를 15%로 낮추기로 했다.
앞서 협상을 끝낸 미국의 ‘전통 우방’ 유럽연합(EU)과 일본과 같은 관세율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선방’으로 평가할 만하다. 미국과 같은 뿌리의 이웃나라 캐나다가 35%, 스위스는 39%, 인도와 브라질이 50%의 ‘관세폭격’을 맞은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생산기지 미국 옮기면 국내 일자리 그만큼 줄어
그러나 협상결과를 찬찬히 짚어 보면 마냥 안도할 상황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고율관세를 면하게 돼 말 그대로 ‘급한 불’을 껐을 뿐 녹록지 않은 과제들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번 협상결과로 한국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누려온 무관세수출 혜택이 사라지면서 국내 기업들의 생산기지 미국 이전이 급증할 전망이다. 한국 기업들이 경쟁국 일본과 중국은 맺지 않은 한미FTA 덕분에 미국 수출시장에서 가격경쟁력 우위효과를 누려왔는데, 그걸 잃게 됐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똑같은 대미 수출관세(15%)를 물게 됐는데도 협상결과가 발표된 첫날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주가가 14% 치솟은 반면 현대자동차는 4% 급락한 이유다. 주식시장 투자자들이 이번 협상결과의 핵심을 꿰뚫은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미국 내 현지생산을 더 늘리는 방식으로 대미관세 파고를 헤쳐 나갈 것이라고 즉각 밝혔다. 삼성전자 LG에너지솔루션 등 반도체 배터리 가전 등 다른 분야의 국내 기업들도 똑같은 대응책을 내놓았다. 이들 기업은 이미 미국 곳곳에 현지생산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데, 이번 관세협상 후 미국 내 생산체제를 한층 더 늘리기로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옮긴다는 것은 그만큼의 국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장 해외이전으로 인한 일자리 타격은 이들 대기업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 기업에 부품과 중간기자재를 공급하는 국내 중견·중소기업들도 덩달아 생산기지를 동반 이전할 수밖에 없어서다. 가뜩이나 기업들이 제공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청년실업자 급증으로 고심해 온 한국에 날벼락이 떨어진 셈이다. 이제까지 우리 경제를 떠받쳐온 핵심 산업의 일자리생태계 상당부분을 미국에 내주게 됐다.
둘째, 미국과 관세협상을 타결하면서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 대미투자의 ‘후폭풍’에 대한 대응도 중요하다. 한국은 대미 관세를 15%로 끌어내리는 조건으로 미국 내 조선업에 1500억달러, 반도체·원전·배터리·바이오산업에 2000억달러 등 모두 350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최근 몇년 간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현지공장을 건설하며 투자한 배터리(530억달러), 반도체(430억달러), 자동차(250억달러) 분야에서 83만개의 일자리가 생겨난 것을 고려하면 그보다 두배 이상 많은 이번 투자로 인해 160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미국에 더 내주게 됐다.
뿐만 아니다. 우리 돈으로 490조원(달러당 환율 1400원 기준), 대한민국 연간 예산의 70%에 해당하는 돈을 미국 투자에 쏟아붓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국내 투자에 차질이 빚어짐을 의미한다. 기업들의 국내 신규 설비 및 연구개발 투자가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커졌고, 이런 투자 위축은 또다른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게 뻔하다. 이중삼중의 일자리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더 왕성한 일자리 창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국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예고된 ‘일자리 대재난’에 대처할 만반의 준비를 지금부터 서두르는 것이다. 어떤 중병이라도 원인이 정확하게 진단되면 맞춤형 치료가 가능한 시대다. 일자리 재앙도 다를 게 없다. 미국과의 관세협상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면 이미 결론 난 합의를 놓고 중언부언해봐야 시간과 국력의 낭비일 뿐이다.
정부는 이 위기를 새로운 산업 육성, 더 왕성한 일자리 생태계 창출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 경제는 지난 20년간 반도체 자동차 석유제품 등 8개 품목이 10대 수출품목 자리를 지키는 ‘고인 물’ 상태에 빠져 있다. 미국의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에 메타 테슬라 등 2000년 이후 설립된 신생 테크기업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혁신’이 발 디딜 틈을 허용하지 않는 규제행정과 재벌대기업들이 만든 강고한 진입장벽 탓이 크다. ‘미국발 일자리 전쟁’에서의 위기를 오히려 더 큰 도약의 기회로 이끌어낼 실력 발휘의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