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국가핵심기술을 국익 관철 카드로

2025-08-22 13:00:03 게재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국가핵심기술 보호 제도는 기술유출을 막는 방패였다. 그러나 트럼프 라운드로 불리는 ‘턴베리 체제’가 부상하면서 기술은 단순 보호 대상을 넘어 국익을 관철하는 협상카드로 격상되었다. 판이 바뀐 것이다. 미국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칩의 대중국 수출을 허용하며 수익의 일부를 국가가 회수하는 방식으로 국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중국은 희토류 소재 및 가공기술을 대외협상에서 필살기로 활용하고 있다. 기술은 더 이상 소극적 방어물이 아니라 협상 상대방을 공략하는 수단이 되었다.

우리 역시 기로에 서 있다. 조선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국가 주력산업의 핵심기술은 보호의 대상이자 협상에서 전략적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메모리반도체와 같이 우리가 선도적 위치에 있는 산업은 국제 협상의 전략 자산으로 기능을 확장해야 한다.

국가핵심기술 제도를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려면

국가핵심기술 제도를 방어에서 공격으로, 보호에서 활용으로 전환하려면 우선 인식전환과 제도적 장치 마련 필요하다. 첫째, 핵심기술을 단순보호가 아닌 전략자산으로 재인식해야 한다. 중요도와 파급력을 평가해 등급별 관리체계를 도입하고 절대 이전 불가 기술은 강력히 차단하되 협력 가능한 기술은 조건부 이전, 공동연구, 국제표준 연계 등으로 제한적 공개를 허용해야 한다.

둘째, 사후규제에서 사전육성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연구개발 초기단계부터 예비 보호 대상을 지정하고 보안설계와 활용계획을 병행한다면 기술개발 전(全)과정에서 연속적 보호와 지원이 가능하다. 이는 단순 보호주의를 넘어 상용화와 경쟁력 강화를 병행하는 길이다.

셋째, 신비주의를 벗어나 전략적 공개와 동맹 협력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제한적 공개를 통해 신뢰를 확보하고, 한·미·일 또는 한·EU 같은 동맹 협력형 보호체제를 구축해 공동심사·제재체계를 운영한다면 개별 국가 대응보다 억제력은 크고 기술 외교·안보동맹도 심화된다.

넷째, 단속 중심에서 기업 동반자적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기술 가치 평가와 위협 진단을 토대로 계약과 내부통제, 공급망 보안을 아우르는 맞춤형 컨설팅과 법률·재정·보안지원을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공공조직이 필요하다. 피해 발생 시에는 법률 지원과 디지털 포렌식, 긴급 자금 연계까지 포함하는 안전망이 작동해 기업의 신속한 회복을 뒷받침해야 한다. ‘단속’과 ‘규제’만으로는 기업과 시장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개정된 산업기술보호법은 지정 기준을 정교화하고 심사범위를 확대해 수동적 금지에서 능동적 관리로 전환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기술보안센터’ 신규지정이다. 센터는 단속을 넘어 상시 진단, 위험 분석, 국제협력 지원을 수행하는 거점으로 기능하며, 표준계약과 보안지침을 축적해 기업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해외 파트너와의 신뢰까지 담보하는 중추 거점이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급격한 기술발달 속도에 맞추어 AI·양자·바이오 등 신흥기술의 보호에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센터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냉철한 전략과 신속한 실행

핵심은 선택과 집중이다. 국가 전체 이익을 극대화할 기술을 식별하고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조정하는 역량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세심한 정책설계가 ‘공격적 보호 전략’을 담보한다. 결국 기술은 연구실의 성과에 머무를 게 아니라 협상 테이블 위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자산이 되어야 한다.

WTO체제의 방패논리를 넘어 턴베리 체제의 협상질서를 정확히 읽고 내재화할 때 한국의 국가핵심기술은 보호와 활용을 동시에 달성하면서 더 큰 국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방어에서 공격으로’라는 구호가 아니라 냉철한 전략과 신속한 실행이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