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프3 유예한 ESG 공시 최종안, 여전히 ‘미흡’
기후 부문만 의무화… 사회·거버넌스는 자율 ‘한계’
투자자 보호·투명성 제고 방향으로 지속 보완 필요
윤석열 정부에서 무기한 연기됐던 지속가능성(ESG) 공시 의무화 제도 최종안이 드디어 공개됐다. 올해 2월 발표된 개정 초안보다 공시 대상을 연결자산총액 30조원 이상에서 1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하고, 한국거래소 공시가 아닌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를 통한 법정공시를 도입하기로 한 점은 개선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스코프3(공급망 내 온실가스 배출)’ 정보공시 의무화를 3년이나 유예한 점은 공시 실효성과 책임성 부분에서 여전히 미흡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 기후 등 환경 부분 공시만 의무화하고 사회(S)와 지배구조(G)는 여전히 자율공시로 남겨준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시민사회단체와 전문가들은 이번 최종안이 ‘기업 부담 완화’라는 명분에 지나치게 매몰돼 ESG 공시의 본질인 ‘투자자 보호’와 ‘시장의 투명성 제고’를 놓치고 있다며 지속적인 제도 보완을 촉구했다. ▶관련기사 21면
◆자산 2조원까지 공시 확대, 검토 아닌 확정 필요 = 1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은 당정협의회를 개최하고 ‘지속가능성(ESG) 공시 제도화 방안(최종안)’을 발표했다. 초기 논의 과정에서 공시 의무화 대상을 ‘연결자산총액 30조원 이상’의 초대형 상장사로 한정하려던 계획을 수정해, 최종안에서는 ‘1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했다. 또한, 한국거래소를 통한 단순 자율 규제 성격의 공시가 아닌,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를 통한 ‘법정공시’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는 개정 초안 대비 시장의 투명성과 정보의 무게감을 높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투자자 보호를 위한 공시제도로 자리 잡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있다. 특히 자산 2조원까지 공시 대상 확대를 ‘평가 후 검토’에 맡겨 단계적인 의무 공시 확대 계획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한 점은 뚜렷한 한계다. 통상적으로 대기업을 분류하는 기준을 자산 2조원으로 삼아온 관례에 비추어 봐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글로벌 공급망의 직접적 경쟁국인 일본의 경우 2027년부터 자산 3조엔(약 27조원)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공시를 시작해 2028년에는 1조엔(9조1000억원) 이상으로 대상 기업을 확대하는 것과 비교해도 턱없이 느슨한 안이다.
2021년 제시됐던 최초 ESG 공시계획대로라면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은 이미 2025년부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를 해야 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들어 도입 시점이 ‘2026년 이후’로 무기한 밀린 바 있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2030년 2조원 확대 검토’는 시장의 불확실성 제거 차원에서 ‘검토’가 아닌 ‘확정’으로 할 필요가 있다”며 “코스피 상장사만이 아니라 향후 코스닥 상장사, 일정 규모 이상 비상장사 등에도 ESG 의무공시 적용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알맹이 빠진 기후 공시 =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던 ‘스코프3’ 공시는 3년 유예가 적용돼 2031년부터 공시를 시작하도록 했다. 일본과 호주가 1년의 유예기간만 두고 예측 가능성을 높인 것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이미 우리나라 기업이 2023년 127개, 2024년 158개, 2025년에는 222개사로 상당수가 이미 스코프3를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업 부담 완화에만 무게를 두며 국제 정합성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로 평가된다.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한국 기업의 지속가능성 정보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위험이 크다.
스코프3란 기업의 직접적인 제품 생산 과정을 넘어, 협력사 등 공급망 전체와 제품의 소비 및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치사슬 전반의 총 온실가스 배출량’을 의미한다. 이는 기업이 직면한 실질적인 기후 전환 리스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정보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스코프3 정보는 면책제도에 당연히 포함될 수 있는 기후정보이므로 3년이나 공시를 유예할 이유가 부족하다”며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의 방침, 국제적인 투자자 그룹 및 국민연금 등의 요구처럼 1년 유예가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총장은 “스코프3 산정 등과 관련해서는 지식과 경험, 인프라의 축적이 중요하다”며 “유예된 시간은 이러한 경험의 축적 시간이 아니라 지체된 시간에 불과한 사례가 많다”고 꼬집었다.
◆S(사회)·G(지배구조) 공시도 강화해야 = 이번에 발표된 ESG 공시 최종안이 ‘기후 공시’에만 머물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은 투자정보로서의 유용성 측면에서 공시 대상의 확대 등을 요청해 왔다. ESG 공시는 기업을 위한 규제가 아니라 자본시장을 위한 정보 인프라다.
투자자는 재무 정보뿐만 아니라 기후위험, 공급망 리스크, 인적자본, 지배구조와 같은 지속가능성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기업의 미래가치와 위험을 평가한다. ESG 공시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투자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다. ISSB 역시 지속가능성 공시의 목적을 ‘투자자의 의사결정에 유용한 정보’ 제공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ESG 공시가 제 역할을 다하려면 환경(E) 영역 중 기후를 제외한 생물다양성, 수자원 등 기타 환경 이슈는 물론, 노동·인권 등 사회(S) 분야와 이사회 구성 등 지배구조(G) 정보까지 포괄하는 ‘통합 공시 체계’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최종안은 기후 외의 영역을 대부분 기업의 ‘자율 공시’에 맡겼다. 참여연대는 “자율공시는 기업별 공시 수준의 편차를 극심하게 키우고, 결과적으로 투자자에게 비교 가능한 유의미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장진나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노무법인 현율 대표)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우 기업을 평가할 때 기후 문제와 함께 사회영역, 지배구조 부문을 모두 중요하게 본다”며 “사회·지배구조 영역 공시를 자율에 맡겨둔 채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기대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장 부회장은 “국내 수출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환경 부문 공시만으로 어렵다”며 “자본시장법 시행령으로라도 사회·지배구조 공시 강화를 넣는 등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광범위한 면책(Safe Harbor) 규정, 그린워싱 우려 = 법정공시 도입 초기 3년 동안 제공되는 과도한 면책(Safe Harbor) 규정 역시 제도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됐다.
정부는 제도의 연착륙을 돕기 위해 공시 전반에 대해 자본시장법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 행정제재, 형사처벌을 폭넓게 면제해 주기로 했다. 고의적인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고 예외를 뒀지만, 금융위원회는 위반 판단 기준에 대해 “불법성에 대한 인식 여부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어 향후 사례가 축적되어야 판단 가능하다”는 소극적인 답변을 내놨다.
공시 정보의 객관성을 검증할 ‘제3자 인증’ 의무화마저 2030년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시장에서는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광범위한 면책이 주어지고 검증 장치마저 부재해, 제도 도입 초기 ESG 공시의 책임성과 데이터의 신뢰성을 과연 누가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참여연대는 “과도한 면책 규정을 재검토하고 제3자 인증 등 신뢰성 확보 장치를 앞당기는 등 공시의 책임성과 실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보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