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과학기술·이공계 중시 국가’로 가는 길
정부가 22일 수정 경제전망을 통해 올해 경제성장률을 0.9%로 낮췄다. 1월 전망치(1.8%)와 비교하면 반토막났다. 노동·자본 등 생산요소를 동원해 물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이룰 수 있는 잠재성장률(1%대 후반)에 한참 못 미친다. 경쟁국인 대만이 성장률 전망을 3.1%에서 4.45%로 높인 것과 대비된다. 정부 스스로 0%대 성장률 전망을 내놓은 것은 코로나19가 심각했던 2020년 이후 처음이다. 경제현실에 대한 진단도 비장했다. 8쪽에 걸쳐 실상을 분석하며 ‘우리 경제를 떠받칠 산업을 찾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도 비상상황’으로 규정했다.
그동안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내놓는 경제정책방향에서 전임 정부의 정책 실패를 비판하면서 ‘위기’라는 표현은 썼어도 ‘절박한 상황’ ‘비상상황’은 없었다. 그래서인가. 이재명정부는 경제정책방향 명칭을 ‘경제성장전략’으로 바꿨다.
AI 대전환·R&D 확대는 옳은 방향
그러면서 내놓은 해법이 인공지능(AI) 대전환과 초혁신경제다. AI 대전환에는 범용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 등 AI 기반을 다지고 활용을 촉진하는 프로젝트 15개, 초혁신경제에는 첨단소재·부품, 기후·에너지 기술, K-콘텐츠·식품 등 한국이 강점을 지닌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프로젝트 15개를 담았다.
같은 날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주재하고 35조3000억원의 내년도 국가연구개발(R&D)사업 예산안을 심의·의결했다. 올해 예산보다 19.3% 많은 사상 최대 규모다. AI 예산을 두 배 넘게 늘리고 석·박사급 처우 개선 등 이공계 인재 육성 예산도 확대한다.
AI 대전환과 R&D 예산 확대는 옳은 방향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뜬금없이 “과학기술 카르텔” 운운하며 R&D 예산을 대폭 삭감해 기초과학 연구 생태계를 망가뜨렸다. 이과생의 의대쏠림 현상도 심화시켰다. 이번 AI 대전환과 R&D 예산 정상화를 한국이 ‘과학기술·이공계 중시 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AI 대전환과 초혁신경제, R&D 성과는 단기간에 나타나기 어렵다. AI 시대에 걸맞은 교육·노동개혁이 뒷받침해야 산업현장 혼선을 줄일 수 있다. AI 대전환을 주도할 기업들의 고충에 귀 기울이고 규제를 혁파하는 것도 긴요하다. AI는 아직 다수 일반 국민에게 생소하다. 생활형 AI 시연과 스타 벤처기업 육성을 통해 AI 붐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R&D야말로 성장동력의 밀알이고 과감한 투자와 더불어 실패가 용인되는 용처임을 국민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때마침 국내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소금쟁이가 물 위에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원리를 구현한 초소형 로봇을 개발한 소식이 전해졌다. 아주대 고제성 교수팀이 5년여 시행착오 끝에 만든 로봇은 환경감시와 재난구조 활동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AI에만 올인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AI가 과대 포장됐다’는 경제학계 의견이 있다. AI가 생산성을 높여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려도 ‘고용 없는 성장’으로 대기업이나 테크기업의 시가총액만 부풀리고 일반 국민의 소득증대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석유화학·철강·기계·자동차부품 등 한국 주력산업이 중국의 부상으로 위협받고 있다. 이들 산업에 AI를 탑재하면 살아날까. AI보다 ‘녹색 옷’을 입혀야 경쟁력이 커질 수 있다. 정부도 경제성장전략에서 “디지털 전환(DX)에는 성공했지만 AI전환(AX)・녹색전환(GX)이 지연되는 가운데 중국 기술에 추월당했다”고 분석했다.
녹색 전환(GX)·규제개혁에도 힘써야
세계경제를 흔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발 관세전쟁의 근원은 기술패권 다툼이다. ‘과학기술 경쟁력=경제안보력=국력’인 시대다. 트럼프 1기 정부에 이어 2기 정부 들어 노골화한 자국중심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겪은 세계는 여간해서 그 흐름을 벗기 힘들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동원한 마스가(MASGA) 프로젝트도 우월한 조선 기술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철저한 거래(딜)주의자다. 미국정부가 경영난을 겪는 자국 반도체 기업 인텔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지분을 확보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같은 논리로 미국에 공장을 건설 중인 삼성전자에 보조금을 주면서 지분을 요구하려들 수도 있다. 한미정상회담과 후속 협상에서 코리아 민관 원팀이 한국의 경쟁력을 충분히 살려 국익을 지켜내길 응원한다.
양재찬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