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베트남 군대가 대한민국의 K9 자주포를 도입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여러 감회가 새로워진다. 공산당이 일당통치하는 베트남은 1960~1970년대 한국군과 총부리를 겨눈 적국이었고, 지금도 러시아 등 공산권 국가 무기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한국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교류하고 있지만 국방에 관한 한 요지부동이었다.
1991년 여름, 한국 언론인으로는 처음 공산베트남 정부의 공식 취재초청을 받아 호찌민 공항에 발을 디딘 때가 생각난다. 베트남정부는 기자에게 맨 먼저 전쟁박물관을 들르게 했다. 입구에 걸린 대형 세계지도에 ‘베트남을 침략한 제국주의 국가와 부역국가들’을 표시했는데 한국이 선명하게 포함돼 있었다. 사진자료실에는 따발총을 든 조그만 체구의 베트콩 소녀 앞에 두 손을 번쩍 든 ‘침략자’ 한국 참전군인의 모습도 전시돼 있었다.
베트남정부가 제공한 기자의 취재신분증서에는 국적이 ‘NTT’로 표기돼 있었다. 알아봤더니 베트남식 한자 발음으로 ‘남조선’을 뜻하는 ‘남쮸찌옌(Nam Trieu Trien)’의 알파벳 머리글자였다. 이듬해 국교 수립과 함께 ‘한꾸옥(Han Quoc, 한국)’으로 바꿔 부르기 전까지 한국은 베트남정부에 ‘적성국가 남조선’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봉제섬유산업을 한국 기업인들이 간판 수출산업으로 개척해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가전제품 등 고부가 품목은 일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유일한 예외가 삼성전자의 흑백TV였는데, 일본회사들이 생산을 중단하면서 설비와 기술을 삼성에 이전해준 덕분이었다.
'상전벽해' 일어난 한·베트남 교류
그랬던 한·베트남 교류에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일어났다. 베트남의 해외시장 최대 수출품목이 첨단스마트폰인데, 삼성전자가 세운 현지공장에서 만든 것들이다. 베트남뿐 아니라 전세계 시장에서 삼성과 LG의 TV 등 가전제품이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등 일본 제품들을 밀어내고 최고급 브랜드로 자리잡은지도 꽤 됐다.
이젠 그런 단계도 넘어 베트남이 국방력 강화를 위한 최첨단 장비로 한국산 K9 자주포를 선택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최고 권력자 또럼 공산당 서기장이 최근 부산 신항을 방문해 완전 자동화된 항만운영 현장을 속속들이 살폈다. 해안선이 긴 지리적 특성을 살려 항만산업을 베트남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는 계획을 추진 중인데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항만 자동화 기술력과 운영노하우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에 도전장을 던지고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며 일궈 온 성과들이 곳곳에서 빛을 내고 있다. 이미 세계 최고반열에 오른 반도체 자동차 가전 등의 산업만이 아니다. 변변한 국방장비 하나 없이 외국 지원에 송두리째 의존했던 나라가 자주포 전차 미사일은 물론 항공기와 잠수함까지 수출하는 세계적인 방위산업국가가 됐다.
선박건조와 원자력발전산업은 미국이 ‘세계 1강’을 자임하면서도 스스로 취약함을 자인하고 한국의 ‘선진’ 기업들에 기술협력 러브콜을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중국의 해군력 증강에 맞서기 위해 ‘해양지배력 회복 행정명령서’에 서명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자국 조선업체들의 역량이 너무나 취약해서다. 2차대전 때만 해도 군함 수천 척을 건조하고 대형수송선을 며칠 만에 만들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특수선박을 제대로 만들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중국의 선박건조 능력이 미국의 233배에 달한다는 미 해군당국 보고서가 나와 있다.
이런 미국의 ‘아픈 곳’을 해결해 줄 최적의 우방 파트너국가가 조선업에서 세계 최고수준 실력을 가진 한국이다. 최근 한미 관세협상에서 한국이 비장의 카드로 ‘마스가(MASGA,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구호를 내세우자 미국 대표단이 반겼던 이유다.
원자력발전도 한국이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분야다. 미국은 인공지능(AI) 혁명으로 전력수요가 급증하면서 원전을 향후 25년간 4배로 늘린다는 계획을 발표하고는 한국과의 기술협력을 타진하고 있다. UAE에 이어 체코 등에 원전사업을 수출하면서 쌓은 성과와 신뢰를 인정받은 결과다.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한 까닭
이렇게 여러 산업에 걸쳐 한국은 글로벌 무대에서 막강한 저력을 떨치고 있다. 석유화학 철강 섬유 등 일부 주력산업이 시련을 겪고 있지만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낼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하면 된다’는 전세계를 눈부시게 빛내고 있는 ‘K파워’의 원동력이자 비결이다.
나라 안팎으로 한국 경제의 앞날을 낙관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기업과 기업인들이 마음껏 창의력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이 절실하다.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