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바꾸는 에너지 질서 “안보 최우선”
중동전쟁 14일째 국가별 에너지전략 수술
비축유 방출에도 브렌트유 100달러 돌파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중동전쟁이 14일째로 접어들면서 글로벌 에너지시장이 격랑 속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국제유가 급등과 공급불안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세계 각국의 에너지정책은 기후 중심에서 안보 중심으로 급격히 이동하는 양상이다.
이날 ICE선물거래소에서 5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종가는 배럴당 100.46달러로 전장보다 9.2% 급등했다. 브렌트유가 종가 기준 100달러 위에서 마감한 것은 2022년 8월 이후 3년 7개월 만이다.
◆석탄·가스 확보 전쟁과 다층적 에너지 믹스의 등장 = 이처럼 에너지시장이 동요하는 이유는 단순한 가격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 자체가 지정학적 리스크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캠퍼스의 데이비드 빅터 교수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은 에너지안보의 중요성을 모두에게 다시 일깨워 주었다”며 “그 일깨움으로 사람들의 반응이 극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했다.
수년 동안 많은 국가와 세계 지도자들은 지구온난화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선언하고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을 촉구해 왔다. 하지만 최근 지정학적·무역적 위험이 고조되면서 각국이 에너지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다시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실제로 여러 국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움직임을 전했다.
유럽과 아시아 일부 국가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와 마찬가지로 태양광과 풍력, 배터리 투자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유엔 기후변화 책임자인 사이먼 스틸은 재생에너지 투자가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미국-이란 전쟁 개시 이후 각국은 단기적으로 석유 가스 석탄 확보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카타르가 가스 생산을 중단하면서 한국을 비롯해 일본 대만 인도 등 액화천연가스(LNG) 의존 국가에서는 에너지 가격 급등 또는 공장 가동 중단이 발생했다.
베트남에서는 주유소 품절 사태가 나타났고, 파키스탄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주 4일 근무제를 권고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연료가격 통제에 나섰다.
◆생산보다 안전한 수송체계가 더 중요 =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공급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2031년까지 LNG 수출 능력을 두배로 늘릴 계획이다.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은 자국에서 확보 가능한 석탄 발전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확대도 동시에 진행된다.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중단했던 원전을 재가동하고 있으며, 유럽은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태양광 설치 규모를 크게 늘렸다. 중국은 태양광 풍력 원자력 투자를 확대하는 한편 석탄발전을 유지하는 다층적 에너지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글로벌 투자회사 칼라일(Carlyle)이 2025년 발표한 보고서 ‘새로운 에너지 질서’(The New Joule Order)에서 이미 예고됐다. 보고서는 “앞으로 에너지 전환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은 기후가 아니라 안보”라고 진단하며 에너지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1973년 중동전쟁으로 시작된 1차 오일쇼크 이후 1993년까지의 에너지 안보 시대 전환 속도가 2010~2024년 탄소중립 시대보다 더 빠르거나 비슷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화석연료는 사라지지 않고 천천히 감소할 것이며, 앞으로는 석유 생산 정점(Peak Oil)보다 석유 무역 정점(Peak Oil Trade)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석유 생산량이 부족해지는 것보다 국경을 넘어 안전하게 수송하는 체제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의미다. 특히 화석연료는 거래 가능한 에너지이기 때문에 무역·해상 운송이 위협받으면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정 에너지원 탈피와 다원화된 믹스 전략 필요 = 보고서는 현재 상황을 “에너지 질서의 전환기”로 규정하며 “앞으로의 핵심 과제는 특정 에너지원 선택이 아니라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정학·금융·공급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하나의 에너지원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미래 에너지 시스템은 다원화된 에너지 믹스가 될 것”이라고 제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전 고위 관계자는 “반세기 전 오일쇼크가 세계 에너지 구조를 바꿨듯 이번 미국-이란 전쟁도 세계 각국의 에너지 전략을 다시 쓰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